철 늦은 꽃 (4) 古宮(고궁)의 뜰에서 ④
발행일1969-01-19 [제652호, 4면]
탑 있는데를 돌아 둘은 여전히 말수가 적게 그리고 천천히 고궁안을 거닐었다. 창경원이나 덕수궁 같지는 않으나 그런대로 경북구의 뜰안을 즐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개 젊은 「아베크」들이었으나 어린이를 데린 가족들도 없지 않았다. 근처에서 살고 있는 소년들인듯한 오륙명의 중학생쯤 되는 아이들도 즐겁게 뛰놀고 있었다.
현주는 중년신사의 옆에 서기도 하고 뒤를 따르기도 하면서 그러니까 신사가 인도하는 대로 경복궁 뜰안을 부담감이 없이 구경하고 다녔다.
현판(懸板)이 주룩 걸려있는데가 있었다. 대개 문(門) 이름들이었다. 문도 많기도 했고 글씨도 가지각색이었다.
『문이 무척 많았군요.』
현주는 문 이름을 세어보다가 불쏙 말했다.
『잘주어 모았지요?』
신사의 대꾸. 그러면서 신사는 오른손 엄지를 펴 가리키면서
『저글씨 재미있죠?』
현주가 보니 색다른 글씨였다.
『참 그렇네요』
그뒤부터 현주는 문 이름과 현판의 수보다 글씨가 어떻나를 비교하는데 신경을 써가며 역시 현판을 쳐다보는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참으로 글씨도 가지각색이었다.
어필(御筆)도 있었다.
『앗 실사구시, 많은 문속에 이건 색다른 현판일걸요』
신사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더듬어 가보니 「實事求是」 넉자가 가로날카로운 글씨로 씌어져 있는게 눈에 띄었다.
『정말?』
『글씨는 재미있죠?』
『예』
『집에 떼다 붙여놨으면…』
말하면서 신사는 현주를 보고 웃는다.
현주도 맞웃으면서
『서(書)에도 조예 깊으신 모양이시죠?』
『어디요, 보는걸 좋아할뿐…』
그뒤부터 신사는 현주에게 현판글씨에 대해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약간 피로감이 찾아왔다.
둘은 다시 가까운 벤체에 앉았으나
『어디가서 뭐 먹을까요?』
얼마후에야 신사의 말이었다.
현주는 폐를 끼치는건 아닌가 생각되었으나 상당히 시장기가 느껴짐을 깨달았다. 그러나 얼른 그러자고 말할 수 없었다.
『점심겸 저녁겸』
신사는 역시 말수적게 발음하고 일어섰다. 현주는 이렇게 하는게 좋은 일일까? 망서려지면서도 따라 일어서 서는걸 또 어쩔 수 없었다.
들어가던 동쪽문으로 나왔다.
마침 빈차기 있어 둘은 자연스럽게 차안의 사람이 되었다. 신사가 말했다.
『어디 좋은데 없어요?』
자신은 서울살지 않으니 잘 모른다는 뜻이 감추어 있었다.
『글쎄요.』
대구서 온 손님이니 대접해야 된다는 생각이 현주의 망서려지는 마음을 개운케 만든 것이랄까?
『어디 안내해주시죠.』
『그러죠.』
현주는 이땐 가볍게 대답이 나갔다. 운전수에게 경양식이 맛있는 M호텔 그릴을 일러주었다.
『예엣.』
차가 속력을 더했다.
둘은 M그릴 홀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이 시간 무렵엔 그릴이 붐비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호젓하지 않으리 만큼 손님들이 있어,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ㄷ. 현주는 오히려 호젓하지 않은게 좋았다.
각각 간단한 걸로 청해, 배를 불리고 있으려니 피로도 풀리고 마음이 명랑해지는 것인가? 대구신사는 약간 다변으로 변했으나 현주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지금쯤, 제 친군 맞선보고 있을거에요. 앗참 이젠 끝난는지 모르지마는…』
『그래요?』
『날 응원대장겸 뭐라나요, 함께 가자는걸…』
『나때문에 못했다는 거군요.』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데 흥미가 없어요.』
『그럴리 없을텐데…』
『만약 좋지 않은 인상이라면, 재미없으지니까…』
『좋지않은 인상?』
『상대가 말이에요. 친구의 신랑후보자가 좋아보이지 않음…』
『한다고 말하면 도리거 아닙니까? 친구되시는 분에게…』
『그걸 그렇게 얘기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건 왜요?』
『미묘한 심리에요』
말하다가 문뜩 현주는 혜경이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도 데이트다』 데이트임에는 틀림없으나 이런 답답한 것을 헤경이가 굉장한 것으로 짐직하고 쉽게 물러선 사실이 우습게 여겨지기도 했다.
『홋홋』
『왜또 웃으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미심장한 것 같은데?』
하고 대구신사는 무얼 말할까 하다가 그만두는 눈치였다. 현주는 까닭없이 긴장해지면서 다시금 경계하는 심정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구신사는 그후 별로 말이 없이 담배를 피우다가 재떨이에 부벼끄고 답답하게
『시간 너무 빼앗은 것 같군요』 일어섰다.
『뭐별로.』
도링 남자의 답답한 태도가 현주는 미흡하다는 느낌이었다. 현주가 셈을 치르려고 했으나 어느곁에 대구신사가 밀해버리고 있었다.
『대구오면 들려주시오』
『예』
밖에 나와서는 둘은 답답한 대화밖에 주고받지 않았다. 그리고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