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포교의 날」을 맞이할 때마다 교회는 포교사업을 위한 헌금모집에 신경을 쓰며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가톨릭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중대한 사명감으로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에 참여하도록 강조하며, 주의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 포교의 날을 갖는 목적에 큰 의의가 있으리라.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교역자나 신자를 막론하고 전교회가 총 동원되어 포교에 총력을 경주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공의회의 적극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오히려 선교활동이 완화되어가고 포교의 필요성이 경시되어가고 있는 경향에 있는듯하다. 설령 이러한 판단은 노파심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모르나 공의회이후의 교회내 심리적 상태는 확실히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 둔감하여지고 있다. 이러한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이런데로 방치(放置)된다면 교회의 장래에 암운(暗雲)이 닥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지난 9월 15일부 「가톨릭시보」는 금년 6월말까지의 통계에서 지난 1년간의 교세증가 수는 지난 10년간의 증가율 중 가장 적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저하현상은 우선 사회도덕의 원천이며 온상인 교회가 그 「이미지」를 국민들로부터 그 빛을 잃거나 실의(失意)되어 오지 않았는가하며 또한 국민의 경제성장이 증가되면서 현실의 안일추구로 종교의 무관심이 따르게 되었으며 일부 서민층에 대한 구호물자의 중단도 크나큰 영향을 가져왔으리라 한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열의가 냉각되어 포교는 커녕 자기의 신앙에도 충실치 못한데 있지 않는가 생각된다. 그러면 포교에 대한 이 무관심 현상의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으로 먼저 신학적 성격의 원인을 들 수 있다. 종래에 간행되었던 포교를 위한 책이나 잡지는 비가톨릭신자의 구원의 유일한 수단은 포교라고 말하였다. 한편 포교열(布敎熱)을 북돋우기 위한 표현으로 비가톨릭신자들은 가톨릭신자가 누리는 그 많은 은총을 전면 받을 수 없으며 구원이란 아예 상상도 못할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극단적인 판단의 표현이 주어져 왔었다. 이러한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표현은 살림신자들로 하여금 암흑에서 방황하는 많은 비가톨릭신자들의 구령을 위해 희생과 역경을 무릅쓰고 봉사하도록 하였으며 적극적인 선교활동에 열의를 내게한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와 반면 종래의 가톨릭신학이나 교회의 교리권의 가르침은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한 비가톨릭신자들의 구원에 관해서 그렇게까지 비관적인 단정은 절대로 내리지 않았다. 초대 교부들과 그 이후의 신학자들, 그리고 교회의 교도권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함을 받고 진리를 완전히 인식하기를 원하시느니라』(띠모테오 전서 2·4)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따라 성실히 가르쳐왔다. 다시 말해서 사실 교회 밖에서 구원받는 다는 것은 아주 어렵지만, 하느님은 자기 양심에 새겨진 도덕율에 따라 최선의 노력으로 성실하게 사는 모든 사람에게도 구원의 은총을 주신다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의 일원이란 세례를 받음으로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자기 탓 없이 교회밖에 있는 자들도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양심법에 따라 살기 때문에 선의의 모든 사람들도 교회의 일원이며 구원의 대상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확실한 근거는 교회헌장 제16조로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본인의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교회는 알지 못하나 하느님을 성실한 마음으로 찾으며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된 하느님의 의사를 은총의 작용하에 행동으로 실천하려고 힘쓰는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본인의 탓 없이 아직 명백히 하느님을 인정하기에 이르지는 못하였을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올바른 생활을 영위하려고 힘쓰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그 섭리로 인해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교리를 자의(字意)적인 고정관념에 빠져 포교의 필요성마저도 부정되는 줄 왜곡(歪曲)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가능한 것이 사실이라면 포교가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차라리 그 많은 인적 물적 자원과 노력을 세계물자, 기근, 후진국개발 등의 시급한 당면과제에 사용할 일이지 하고 반문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에 명시되었듯 포교사업은 『하느님의 백성의 근본적 의무』(35조)라는 정의(定義)를 망각하고 교회의 기본적 활동이 제2차적인 문제로 격하된 모양이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마르꼬 16·15)는 말씀은 교회의 존재이유를 내포하고 있으며 거기에 따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즉 복음선포는 교회의 가장 근본적 사명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모든 목적은 포교에 예속된다. 교회는 결코 모든 인간적 문제를 도외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며 그리스도 친히 교회에 위탁하신 고유한 역할인 세상의 빛이며 소금인 복음의 선포에 정진(精進)하고 있다. 이것이 교회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본질적 사명이다. (계속)
(『시복식 참석기」는 제2면에)
鄭銀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