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
오늘로서 계획있는 「로마」관광을 모두 끝마쳤다. 오전 중에는 「바티깐」박물관과 「성베드로」대성당을 돌아보고 오후에는 「까따꿈바」와 「성요한」대성당 성계단 「성모대성전」을 돌아보았다. 어느 성당을 막론하고 그 규모나 내용이 한국에서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풍부했으며 어느 성당을 막론하고 사도나 교황의 유해를 모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교황청을 정면에서 바라볼 때는 약간 실망을 했다.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지저분해보였기 때문이다. 대박해때 순교한 이들을 장사지내고 신자들이 은거했다는 「까따꿈바」는 한곳이 아니라 45군데나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가 들어가 본 「성세바스띠아노·까따꿈바」는 겉에서면 허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하기는 지하에 굴을 판 것이니까 지상의 건물이야 아무래도 관계없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하도 거창하다는 말을 많이들은 탓인지 가벼운 실망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안내하는 젊은 신부의 뒤를 따라 총연장 40리나 된다는 4층 지하무덤의 일부를 돌아보고서는 마음이 바뀌었다.
하도 동굴이 꾸불꾸불하고 가지가 많아서 「로마」시민도 길을 한번 잘못 들으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여행사 안내원의 말을 듣고 겁이 났던지, 다른 곳에서는 인도자의 말을 잘 듣지 않던 소위 『농땡이』들도 앞사람의 허리띠를 붙잡다 시피하고 줄줄 잘 따라다닌다. 굴 옆에 옴폭옴폭 파놓은 곳에 아직도 남아있는 순교자들의 자디잘게 분해된 유해와 굴벽에 새겨놓은 초기 교회신자들의 암호였다는 물고기는 특히 인상에 남았다.
「로마」 관광을 실제적으로 모두 마친 오늘 누가 나한테 가장 인상적인 것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일각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겠다. 성계단(聖階段)이라고.
「성 요한」대성전은 14세기까지 교황청이 있던 「라떼란」언덕에 있었다. 이 대성전의 길 건너편에 있는 조그만 성당이 바로 성계단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 곳이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께서 본시오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러 끌려가실 때 디디고 올라가신 계단들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수십 층의 나무 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성당의 정문을 들어서면 곧 세개의 계단이 있는데 양편의 것들은 돌계단이요. 가운데 계단은 성녀 헤레나가 기원 4세기에 「예루살렘」에서 뜯어다 옮겨 놓은 바로 그 계단이다.
순례자들은 그 높은 계단을 걷지 않고 기어서 올라간다. 각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갈 때마다 각각 한번씩 친구(親口)를 하는 것도 전통이라 한다. 한국에서 온 순례자들 중에는 60이 넘은 분들이 상당히 많다. 그렇지만 누구하나 이 계단을 기어서 올라가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무릎걸음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리 큰 경건심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는데 한계단 한계단 올라가면서 달아서 반질반질하는 계단마루에 친구를 해가노라니까 저절로 마음이 경건해지고 예수님의 고난을 뼈로 느끼게 되었다.
세종로에서 왔다는 어느 할머니는 계속 눈물을 닦고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던 것이 불과 다섯 계단도 못 올라가 무릎 뼈가 쪼개지는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자기가 직접 고통을 당해보아야 남의 고통을 안다는 인간끼리의 정신적 이해의 관계는 그대로 인간과 하느님사이의 관계에로 직결되는 것이 아닐까 잠간 생각해 보았다.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저녁 6시에 성당에 모여 미사를 올렸다. 10여명의 신부님이 공동집전하는 「로마」에서의 미사는 퍽 뜻 깊이 남을 것 같다. 「로마」의 성당들에서 복자찬가를 부르며 문자 그대로 한 가족의 미시길은 분위기 속에서 올린 기도의 의향들과 마음의 자세들은 각 사람이 거의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내일은 「베드로」대성전에서 이번순례의 본 목적인 시복식에 참석하고 모레는 교황성하를 알현한다. 이곳의 일정을 끝마치면 「프로렌스」를 위시한 이태리 각 곳의 성지를 거쳐 블란서 「루르드」로 향한다. 순례단원들의 눈에 들어오는 이태리사람들의 인식, 「로마」거리의 풍경 등은 送稿시간 관계로 다음 주로 미룬다. (계속)
趙炳雨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