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뽈·끌로델 百週(백주)]=藝術(예술)과 信仰(신앙)을 中心(중심)한 考察(고찰)
自然主義(자연주의) 物質文明(물질문명)속에 絶望(절망)느껴
詩(시)·信仰(신앙) 通(통)한「靈神的(영신적) 救濟(구제)」를 追求(추구)
地上慾望(지상욕망)의 편역 끝에 빈손 들고 天上渴望(천상갈망)
헛되지 않는 肉體(육체)의 苦痛(고통) 通(통)해 自己聖化(자기성화) 찾고
뽈·끌로델이 「빠리」에서 百餘킬로 떨어진 東北部한시골에서 平凡한 抵當保管人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百年前 8月 6日이다. 1886年 「빠리」에 定着하면서 作品을 試圖했고 21歲에 『黃金머리』라는 重要한 戱曲을 發表함으로써 劇作家로서의 力量을 과시한 以來 戱曲作家요 東西洋을 往來하는 外交官으로서 詩人이요 聖書 愛讀者로서의 그의 著書는 豊富하다.
그러나 그가 廣範한 讀者를 갖기 시작한 것은 60을 바라보는 老年에 들어서서이며 78歲에 「아카데미」회원으로 當選되었다. 皮相的技巧에만 치우쳤던 당시의 文學앞에 直接人間의 呼吸과 맥박을 듣는 듯한 끌로델의 作品이 거칠고 낯선 것이었음은 당연하다. 늦으막에 찬란한 褒賞의 때가 오고야 말리라고 同時代 한 評論家가 豫言했듯이 誕生百週年이되는 오늘날 老衰를 모르는 그의 作品들은 世界무대에 메아리친다. 『나의 作品들은 內的對話 消盡시키기 위한 얼키고 설킨 手段이요, 나 個人의 感情과 思念의 對決이며 數많은 鬪爭을 거쳐낸 努力의 結實』이라고 그가 말했듯 끌로델의 一生은 對話와 鬪爭의 凱歌이다.
19世紀 佛蘭西家庭이 흔히 그러했듯이 어린 끌로델도 첫 領聖體以後로 信仰에 無關心하고 敎會밖에서 자랐다. 그러나 젊음이 樹液처럼 샘솟는 18歲의 靑年 끌로델에게 마침내 精神的渴症이 찾아왔고 이 渴症을 그 時代 知的所產으로는 갈아앉힐 길이 없었다. 과연 19世紀 後半은 自然主義 物質文明이 제패하던 때요 이처럼 숨막히는 도가니 속에서 끌로델의 絕望은 깊어만 갔다. 이는 곧 靈神的 絶望이니 靈神的 救濟로서만 건져낼 수 있는 것이었고 그의 作品의 核心 「테마」인 救濟의 「테마」는 이러한 自身의 體驗에서 由來한다. 이 救濟를 끌로델은 詩와 信仰에서 얻었으며 그에게 詩와 信仰의 一致는 必然的인 것이 되었다.
詩創作을 통해 言語의 物的限界를 무너뜨리고 超自然界를 불러일으킬 能力을 지니게 하여 言語를 物的制約으로부터 解放시킨다는것, 이는 곧 無限界를 呼吸할 수 있는 靈魂의 解放과 相通하는 길이다. 그러나 時만으로는 靈魂의 救濟가 이루어질 수 없다. 時·美·藝術·하는 空中에 뜬 美學만으로는 不足하며 異體性을 지닌 超自然의 化身이 必要했던 것이다.
마침내 1886年 聖誕, 「빠리」의 「노뜰·담」 大聖堂에서 「막니피갓」(성모찬미가)이 퍼져 나오는 순간 끌로델은 電擊的인 信仰의 光明을 받았고 이 信仰의 確實性은 너무나 強한 것이어서 一生을 通해 흔들릴 수 없었다. 이제부터 끌로델에게 詩女神은 곧 神의 聖意요 創造主를 이어 創造의 力事를 編承한다. 마치 司祭의 손에 밀떡의 神秘가 되풀이되듯, 神이 創造한 事物을 詩人이 個個이름으로 불러냈을 때 비로소 그 事物의 存在는 完成되는 것이다.
創造를 繼承하고 被造物을 다스리기 위해 태어난 人間만큼 重要한 素材가 또 있을까? 肉體를 지녔기에 죽을 運命에 놓여있지만 靈魂을 지녔기에 죽음을 拒否하는 것이 人間일진대 人間의 凱旋은 그 中 어느 하나를 擇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데 있지 않고 宇宙를 肉身을 言語를 征服하여 靈魂의 노래와 더불어 創造主에게 바치는 데 있다. 五官과 感覺, 知性과 神秘를 꿰뚫는 直觀을 모두 기울여 하늘과 땅을, 바다와 별들을 神에게 노래하는 끌로델의 詩世界는 凱旋의 行進처럼 生命이 넘친다.
그러나 이같이 勝利의 노래가 종달새처럼 화창한 하늘높이 솟아오르기에는 무거운 肉體가 있어 땅에로 끌어내리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과연 끌로델이 볼때 天上에 反하는 地上의 慾望, 靈에 反하는 肉의 慾求의 울부짖음은 너무나 強하고 正當하게 들린다. 超自然에 눈이 어두운 肉體에게는, 눈으로 보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발아래 펼쳐진 땅덩어리이건, 눈앞에 나타난 女人이건, 財物과 權力이건, 손에 잡히는 것, 당장 잡히는 것에 대한 유혹이 입맛을 돋구는 수수께끼 앞에 횃불을 켜고 칼을 뽑아들고 나서는 人間慾望의 地上遍歷 또한 感動的이며 雄辯的이다.
그러나 所有한다는 것은 限界가 있다. 이 世上 어느한 部分이라도 아직 내것이 되지못한 것이었는 限, 나의 所有慾은 滿足할 수 없으니 나는 오히려 所有慾의 奴隸가 되는 셈이다. 마침내 정복의 頂上에 서서 그토록 피흘려 손안에 넣은 大地를 영원히 所有할 것인가? 그 흙의 한줌도 지니지 못한 채 죽어 몇자안되는 땅에 묻히고 맡게 될 것이란 말인가?
이때에 이르러서야 自己안에 불타고 있는 慾望의 뜻을 깨닫고 滿身창이된 自身을 神에게로 向한다. 地上의 大勝利者가 이제 얼마나 초라한 敗北者로 빈손을 들고 天上을 渴望하는가? 그러나 肉體의 이같은 苦痛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肉體도 제나름의 발버둥 속에 自己聖化를 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같이 가실줄 모르는 목마름이 있었기에 이제 靈魂은 뿌리에서 해방된 풀잎처럼 가볍게 創造主를 向해 질주할 수 있다. 自身을 송두리째 주는데는 限界가 없다.
우리의 무겁고 어두운 肉體를 靈神化하고 征服한 땅에 福音을 傳해서 눈에 보이는 物質의 世界와 눈에 보이지 않는 靈魂의 世界 가 하나가 되어 다시 노래는 퍼져간다. 하나의 물방울이 다른 하나의 물방울 속에 녹아 커다란 하나의 물방울을 이루듯 우리의 靈魂이 生命(神)안에 하나가 되는 神秘, 우리 靈魂이 神의 손에서 태어나는 순간 드높이 불렀을 調和깊은 노래의 열쇠를 되찾으며 天上을 觀照하는 形言할 수없는 歡喜와 感謝의 노래이기에 끌로델의 世界는 盡할줄 모르는 生命을 지니고 있다.
洪承玉(서울大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