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33) <第二話(제2화)> 榮光(영광)의 敗北(패북) ⑲
발행일1968-10-20 [제640호, 4면]
『누추하지만 잠간 들어오시지요.』
집 앞에 이르자 늙은 부인은 윤 사장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정아 처녀가 있으면 좀 나오라고 일러 주십시요.』
『정아 처녀야 아까도 있었으니까 그새 밖에 나가지 않았으면 으례 집에 있을 걸요. 망칙한 집이지마는 잠시 다리라도 쉬어 가시게 들어오시지요.』 늙은 부인은 언덕길을 넘어오는 동안에 친숙해진 탓인지 진심으로 들어오기를 권하였다.
『고맙습니다. 허지만 그렇게 늑장을 부릴 겨를도 없읍니다. 빨리 들어가셔서 정아 처녀나 좀 내보내주십시오.』
『그렇게 하세요. 이거 내집앞까지 오신 손님을 들어오시지도 않게 해서 어떻게 하나.』
늙은 부인은 딱한 얼굴을 하고 윤 사장에게서 보따리를 마저 받아 들고 끙끙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얼마 안있다가 늙은 부인은 대문께로 나와 고개를 쑥 내어밀었다.
『정아 처녀가 집에 있어요. 지금 동생이 와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곧 나올 겁니다.』
늙은 부인은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띄고 윤 사장의 귓전에 속삭여 주었다.
『동생이라니요?』
『왜 모르세요? 정식(貞植)이라고 남자동생이 있는데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지요. 그거 뭐라나 태권도라나 하는거 있지 않아요. 그거 선수래요. 그래서 그런지 기골이 장대하고 대장 감이지요.』
『그러면 정아가 남매이던가요?』
『그렇지요. 남매 사이에 어떻게 서로 아끼는지 가끔 함께 만나서 여러가지 의논을 한답니다.』
늙은 부인은 여기까지 속삭이고는 무슨 인기척을 들었는지 허둥허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윽고 대문에는 정아가 나타났다. 사장을 보자 그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으나 곧 상큼하게 태도를 도사렸다.
『그런데 여길 어떻게 알고 또 찾아까지 오셨지요?』
『정아야, 용서해라. 나는 오직 너를 만나려고 귀국을 했는데 너있는 곳을 어딘들 못 찾아 가겠느냐.』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저는 윤 사장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저는 윤씨가 아니고 김씨에요.
『정아야. 안다. 네가 말하는 뜻을 다안다. 내가 만일 너라고 해도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아니 나는 철저한 성격이니까 오히려 너보다 더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약자이다. 그러구 너나 너의 어머니한테 아무런 욕심도 없다. 그저 내 죄를 사과하고 마음 편하게 죽으려는 생각뿐이다』
윤 사장은 어느 틈엔가 체면없게도 눈물이 흘러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을 가렸다.
『어쨌든 남의눈도 있고 해서 여기서 길게 이야기할 수 없으니 이 골목 밖에 다방에 가서 기다리세요. 제가 곧 따라 나가겠어요.』
『그렇게 해주겠느냐. 고맙다.』
윤 사장은 돌아서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 골목 밖에 어떤 다방이지?』
『골목 밖으로 나가시면 이 동네에 다방은 하나뿐이니까 금세 찾으실거에요.』
『알았다. 그럼 내 거기 가서 기다리마.』
정아가 대문을 닫고 들어갔다. 윤 사장은 천천이 골목 밖으로 나왔다. 이마에 땀이 흘렀다. 피로하였다. 윤 사장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조금씩 다리가 헛놓이고 눈앞이 아뜩아뜩 했다.
(정식이가 대체 또 누굴까? 대학생, 태권도선수 기골이 장대한 대장감…)
늙은 부인이 속삭이던 말이 하나하나 되살아나서 윤 사장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설마하니 명애가 그후에 다른 남자와 만나서 아들을 낳았는가?)
윤 사장은 얼떨떨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아니 오히려 그게 당연한 일이겠지.)
윤 사장은 오히려 그렇게 되는 편이 마음의 부담이 줄어들어서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은실의 말을 들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던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대체 정식이라는 아이는 어떻게 된 노릇이란 말인가?)
골목 밖으로 나오니 가개가 즐비한 변두리 번화가가 곧 눈에 띄었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다방간판이 보였다.
윤 사장은 다방으로 들어섰다. 저녁때가 되어서 그런지 다방은 한산했다. 드문드문 몇 사람의 손님이 앉아 있고 레지가 전축 앞에서 레코드를 만지다가
『어서 오십시요.』
하고 소리쳤다. 이윽고 안에는 우렁찬 음악이 가득히 찼다.
『무엇을 드릴가요?』
레코드를 만지던 레지 색씨가 어느 틈에 윤 사장 앞에 생글생글 웃으며 섰다.
『왜요? 시끄러우신가 보아요.』
윤 사장이 상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레지색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아니오. 몸이 불편해서 그러오. 누구를 기다리는 중인데 홍차를
뜨겁게 해서 한잔 줄 수 없겠오.』
『알겠읍니다.』
레지 색씨는 카운터로 가서 건축의 볼륨을 낮추었다. 벌써 창밖에는 어둠이 서리기시작하고 울긋불긋한 네온이 켜져 있었다. 모든 것이 시골티가 줄줄 흐르는 광경이었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변두리건만 서울이라는 데는 도심지와 시외가 그만큼 큰 차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