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도 11월 한국사연구회(韓國史硏究會) 월례발표회를 통해 「미공개사료 뮤뗄문서」라는 제목으로 그간 2년간에 걸쳐 정리조사해온 뮤뗄 대주교님의 고문서에 관하여 학계에 보고한 바 있다.
이것이 일간지에 사진과 함께 도보됐는데 본인의 발표 내용과는 왜곡(歪曲)된 기사도 있어 기회있으면 직접 이를 소개하고자 뜻하였었다.
특히 뮤뗄 주교의 공적에 관한 일인지라 중대하므로 본지의 지면을 빌어 붓을 들게 되었다.
1784년, 세계사에 유례없는 교회탄생을 이룩한 한국천주교회가 1831년 조선교구(朝鮮敎區) 설정으로 북경교구(北京敎區)로부터 교법상(敎法上) 독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고, 조선교구 사목 전도 책임이 빠리외방전교회(巴里外邦傳敎會)에 위임된 후 오늘날까지 근 140년간 많은 외방인전교신부 특히 프랑스 성직자가 한국땅에 나와 활동하였다. 박해의 험한 역사를 거치는 가운데 10여명의 치명성직자도 배출되었고 일생을 이땅에 묻힌 외국인 성직자의 수도 많다. 유명무명의 외국인 성직자들의 전도 활동이 우리교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음을 잊을 수 없다.
이 땅에서 활동하신 프랑스 성직자 가운데 병인박해에 보령(保寧)에서 순교하신 다블뤼(CAVELUY) 안돈이(安敦伊) 주교님과 박해 시대가 끝난 후 조선교구 제8대 주교로 활동하신 뮤뗄(MUTEL) 대주교님의 활동은 특히 기억할만 하다. 다블뤼 주교님은 순교하실때까지 22년간 살벌한 박해의 위험 속에서 종횡으로 전도활동을 폈으며, 그 어려움 속에서도 영광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세상에 펴기 위하여 한국 교회의 사실(史實)을 모아 기록하여 프랑스로 보냄으로써 뒷날 달레(CH DALLET)의 조선교회사(HISTOIRE DELEGLISE DE COTEE)가 편찬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고 또한 한글의 과학적 연구에 힘씀으로써 한국문화사에 큰 공헌을 남겨 유명하다면, 뮤뗄 대주교는 전후 반세기에 걸친 긴 세월을 한국교구를 위하여 헌신함으로써 박해 후 새 멱사 전개에 발맞추어 한국천주교회의 현대화(現代化) · 토착화(土着化)에 힘써 현대 한국천주교회의 발전토대를 구축하는 위적(偉績)을 올렸다. 또한 기라성(綺羅星)과 같이 빛나는 한국순교자를 온 세상에 빛내기 위하여 시복수속을 촉진하여 마침내 1925년 79위 순교자의 시복을 실현하였다. 뮤뗄 대주교의 공헌이 이처럼 크기에 그는 한국교회 최초의 대주교위(大主敎位)에 올랐었고 교황궁중고등성직(敎皇宮中高等聖職) 로마백작(路馬伯爵)과 교황탑전시종 이란 명예로운 칭호를 교황청으로부터 수여받았던 것이다.
1854년 「빠리」 동남쪽 한 시골 중농(中農) 집안에 태어난 뮤뗄 대주교가 서품받은 것은 1876년의 일이었다. 서품되자 곧 조선교구 근무를 명령받았다. 아직 24세의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청년성직자 뮤뗄이 생명의 위험이 따르는 조선에 잠입(潛入)하고저 만주 땅의 조선교구 임시본부였던 「챠코」에 도착한 것은 1877년의 일이었으나 병인박해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때인지라 이곳에서 3년간이나 조선입국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이 기간 그분은 한글과 한자를 익혔고 한불자전(韓佛字典)의 원고 정리를 맡았다.
1880년말 배를 이용하여 백령도를 거쳐 꿈에 그리던 한국땅에 상륙하였었다. 이후 1885년 유능(有能)함이 빠리외방전교회 본부에도 알려져 외방전교회 신학교 책임자로 소환(召還)될 때까지 조선교구의 한 성직자는 자기 책무를 다하였다.
그가 다시 그의 뼈를 묻을 제2의 조국 한국에 입국한 것은 1891년 2월의 일이었다. 바로 그 전해 8월에 브랑(BLANC) 白 주교에 뒤이어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으로 사목권을 계승케 된 것이었다. 그후 1933년 노환(老患)으로 명동에서 선종(善終)하실 때까지 전후 43년간 직접 간접으로 한국교회의 으뜸으로서 큰 공적을 남겼다.
뮤뗄 대주교는 신부로 9년간 주교로 43년간 조선교회와 관계를 맺은 분이었으며 그의 실제 재한기간은 47년으로 백발의 긴 수염, 온후한 자태, 유창한 한국말, 그리고 그 해박한 한문지식으로 한국을 이해하고 지극히 사랑하였으며 그 자신 한국 땅에 묻히기 소원이었고 사실상 그의 유해는 용산구(龍山區) 소재 성직자묘지(聖職者墓地)에 다른 한국 성직자들과 나란히 누워 용산 함벽정(函碧亭)에 그가 지으신 옛 용산신학당(龍山神學堂) 너머 순교성지(殉敎聖地) 새남터를 굽어보며 안면하고 계시다.
뮤뗄 대주교는 한국교회에 남긴 위적(偉績)으로 특히 중시되어야 할 공경할 지도자이거니와 한국사연구라는 학문적 입장에서도 주목하여야 할 인사이다. 이방인(異邦人)으로서 한국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였고 문화적 외교적으로 공훈을 남기셨음은 물론이거니와 구한국 말기에서 일제시대 전반기에 걸쳐 우리 역사를 밝힐 중요한 기록들을 남김으로써 한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를 제공하였다. 그가 반세기의 한국전도기간 동안 극명(克明)하게 기록한 일기(현재 빠리외방전교회 수장)와 빠리외방전교회 포교보고서에 수록되어 있는 「뮤뗄 대주교의 보고서」(역시 빠리외방전교회 고문서관에 수장)와 본론에서 언급하고저 하는 18,000여건의 자료로 된 「뮤뗄 문서」(양화진순교자기념관 내이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이다. <계속>
이원순(서울대학교 사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