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6일
정가 10시 휘황찬란한 「일루미네이션」이 「베드로」대성당을 대낮 같이 밝혀 놓았다. 곧이어 장중한 「파이프·오르간」의 입당곡에 맞추어 30여명의 붉은 제복을 입은 추기경·주교·몬시뇰이 중앙통로로 들어섰다. 중앙제단 좌우편 특별석에 앉은 5백여명의 한국인들은 낯익은 성직자들의 모습이 나타날 때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들을 주고받는다.
붉은 제복의 대열에는 노기남 전 서울교구장, 장병화 마산교구장, 광주의 김창현 몬시뇰, 전 대전 교구장이며 현재는 프랑스 본국에서 은퇴생활을 하시는 원 주교님의 모습도 보였다. 원 주교님의 출현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모두 손으로 원 주교님을 가리키면서 반가워한다.
주교님들의 대열 맨 끝에는 금색 주교관을 쓴 서울 교구장 김수환 대주교가 대전 교구 부주교 李인하 신부, 프랑스에 유학중인 서공석 신부의 복사를 받으며 입장했다. 추기경과 주교들은 중앙통로에 자리잡은 장궤틀에 착석하고 金 대주교는 중앙 제단 중앙에 착석했다.
곧이어 「불라」낭독이 있었다. 먼저 「라띤」어로 읽은 다음 그 번역문을 李인하 신부가 읽었다.
흥분한 탓인지 이 신부의 목소리는 좀 갈라지는 듯 했다.
「불라」 낭독이 끝나자 김 대주교의 선창으로 감사가 『떼·데움』이 시작되면서 제단전면에 걸려있는 24위 새복자들의 초상화가 「베일」을 벗었다. 대성당을 꽉 메운 수만신자들의 눈이 일제히 초상화로 쏠린다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나타난 그들의 초상화는 너무나 성스러워 보였다. 베르뇌 주교를 선두로 한 그들의 모습은 『떼·데움」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사람들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하였다. 말로만 듣던 교황청 성가대 『떼·데움』은 황홀할 만큼 훌륭한 합창이었다.
이어 김 대주교가 집전하는 미사가 시작되었다. 미사의 여러 부분에 한국어가 사용되었다. 대성당 중앙높이 자리잡은 중계대에는 한국어를 포함한 5개 국어로 시복식을 중계하는 「아나운서」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날 한국어중계를 맡은 아나운서는 이곳에 유학하고 있는 심용섭 신부였다. 특별석에 자리잡은 한국인들은 수많은 고위성직자와 성당안을 메운 세계 각국으로부터 모인 순례자들 앞에서 미사를 드리는 김 대주교의 모습을 자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태극기와 교황기를 들고 식에 참석한 한국인들은, 여자는 치마저고리, 남자는 검은색 양복으로 통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서독으로부터 온 65명의 간호원들도 끼어있었다. 마침 「로마」에 관광왔다가 시복식에 참석한 그들 중에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상당수가 들어있었다. 미사 마지막에는 여기유학하고 있는 박 신부의 지휘로 복자찬가가 대성당에 메아리쳤다. 교황청 합창대의 복자찬가는 한국인들의 쌓였던 감격을 터뜨렸다. 누구하나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女신자들은 이 감격을 주체할 길이 없어 확느껴 울었다. 순례단 「앨범」을 맡아 부산하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백남식씨는 가슴이 메어져 사진도 못 찍었다. 그는 십여년만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오후 4시반.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없이 꽉꽉 들어박힌 인파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으며 교황 성하께서 성당 문을 들어 서셨다.
세상에 나서 보아온 모든 환영 중에 최대의 환영이었다. 성하를 반기는 신자들의 마음이 그렇게 까지 열열한 줄은 미처 몰랐다 강복으로 박수에 답하시면서 제단으로 발을 옮기시는 교황 성하의 모습은 성스러움 그대로였다.
교황 성하의 주재로 성체강복이 있었다. 귀에 익은 성체강복 성가들은 교회의 보편성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했다. 들어오실 때의 정정하신 모습과는 달리, 경문을 읽으시는 성하의 음성은 그의 고령을 느끼게 한다. 음성이 갈라지고 숨이 가쁘다.
성체 강복에 이어 새복자들에게 대한 경의의 의식이 시작되었다. 복도전면에 자리잡은 연단에 올라서신 교황 성하는 한국교회와 그 성실성을 높이 치하하셨다. 이태리 말과 프랑스 말로 연설하신 교황은 현대서구의 정신적 타락상을 개탄하시면서 한국교회와 그 순교자들의 용기와 지혜를 본받아 현재의 혼돈에서 탈피하라고 역설하셨다.
이곳에 오래 거주하고 있는 한국의 성직자와 신자들에 의하면 교황 성하께서 한국 교회에 큰 애정과 존경을 보이신 것은 여러번 있었지만 오늘처럼 격찬하신 것은 처음이라 한다.
성하의 연설에 이어 복자들의 유해 친구가 있었다. 각 수도 단체들이 다투어 먼저 나갔다. 맨 마지막으로 유해 친구를 한 것은 복자 남종삼의 후예들이었다. 성하께서는 이들 각자에게 일일이 악수를 잊지 않으셨다. (계속)
趙炳雨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