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5) 놀람 ①
발행일1969-01-26 [제653호, 4면]
답답한 마음으로 만나기로 했고 만나고 있는 사이에도 역시 답답한 마음을 지켜나가고 있었으나 막상 헤어지고 보니 현주는 갑자기 허전한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더구나 만나고 있는 동안은 별로 말수도 적었고 무엇보다 신사적으로 대해주던 박훈(朴勳)의 태도가 다행이다 싶었으나, 이제 헤어지고 나니 너무 답답했던 그의 언동거조가 아쉽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좀더 로맨틱한 농담을 한다고 해서 누가 나무래겠나?)
갈라질때에는 박훈은 특히 나긋나긋하거나, 모처럼의 데이트의 시간을 오래 가지지 못한다는 걸 아쉬워하는 눈치라고는 없었다. 늘 만나던 사람끼리 빠이빠이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럴줄 알았더면 내가 좀 부드럽게 대해드릴걸…)
그렇더라도 현주는 대구의 중년신사와의 첫 데이트가 인상깊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역시 묵직한 분이었지>)
현주는 얼른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거리를 서성거리다가 문득 혜경이의 생각이 났다. (그애한테나 가볼까?)
궁금증이 치밀었다. 얼핏 팔목시계를 보았다. 다섯시십분전이었다. (이젠 들어왔을거야)
두시에 만난다고 했으니 세시간 지난뒤라 돌아왔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혹 둘이 대뜸 마음에 든다면 함께 극장같은데는 갈 수 있을거라고 맞선본 친구들의 경험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현주는 혜경이네집으로 발을 돌렸다.
혜경이는 마침 집에 돌아와 있었다. 도리어 반갑게 맞아 주면서
『그러지 않아도 너네집에 가려고 하던 참이었어…』
현주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 됐지?』
방안에 들어가면서 현주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눈을 치뜨더니 혜경이는 도리어
『너는?』 물었다.
『나?』
현주는 입가에 웃음을 띄고
『난 그런거 아니야.』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거 아니라니? 데이트 아니었어?』
『만난건 사실이나…』
현주의 입가에 흐리멍덩한 웃음이 다시금 머금어졌다.
『그런데?』
혜경이는 안타깝다는 듯이
『너 무슨 비밀속에서 살고있는지 모르겠구나… 아까 너네집에서부터 네 말 통 종잡아낼 수 없으니…』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비밀이래도 좋고, 보자기 속에서 산대두 좋아… 얘기 할 때 있을거야… 네 맞선결과를 먼저 듣자구나.』
현주는 혜경이가 들까불면 그럴수록 침착해지게 마련이곤 했다. 지금도 그런 경우다. 천천히 말했다.
『얘두 참, 넌 잡아 헤쳐봐야 알아이야. 그런 속알머린 못쓰는거야.』
『난 못쓰는 애니 접어놓고 쓸앤 너나 숨김없이 털어놓으려무나 어떻디?』
혜경이 입을 다물고 있더니
『뭐 그저 그래.』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게로구나.』
『뭐?』
『네 태도가 그렇게 보인다.』
『정말?』
현주는 강렬한 시선으로 혜경이의 눈을 향해 쏘았다. 혜경이 머리를 수그리면서
『한번 다시 만나게 했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것봐 다시 만나게 했다는 사실이 뭘 뜻하는지 알 수 있어.』
혜경이는 머리를 들더니
『호호, 이번 만날땐 널 꼭 데리구 가기루 마음 먹었어.』
갑자기 명랑성을 들이켰다.
『날 데리구가?』
『내 눈엔 엔간하지마는 제삼자, 더구나 우리 현주의 눈에 어떨지… 그게 중요하거든…』
『호호호 이제 실토를 하는구나 내 눈엔 엔간해?』
현주는 웃으면서 말했으나 속으로는 시샘같은 심정이 치밀었다. 첫눈에든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고 생각하니 북훈씨와의 데이트가 더욱 아쉽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분이 알맞는 나이이 젊은 사람이었다면 그리고 그처럼 태도가 정중하고 신사풍이었다면… 나는 그분이 첫눈에 좋아졌을지 모르지…)
혜경이의 경우와는 다르다. 이성간의 결합이란 여러가지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박훈씨와의 데이트도 맞선이나 다를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내색은 조금도 내지 않았다.
『엔간하지 않음 키두 크구 이마두 넓구 코가 좀 낮은 편이나 그대신 꺾어놓을 곳대가 없을테니 차라리 그게 좋지뭐야』
『공처가(恐妻家)의 소질이 있다는거야?』
『공처가는 애처가(愛妻家)의 별명이란다』
『그래? 그럼 다음 데이트에 내가 배석할 필요없지 뭐니?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면…』
『호호호 그래두』
『그래두 난 싫다』
『싫어두 끌구갈걸』
『싫대두』
『끌구갈걸』
둘은 마주보고 깔깔대고 웃었다.
『이쯤 털어놧으니 네 얘기 들려줄 차례야』
혜경이 공격해왔다. 현주는 풀렸던 마음을 가누어 잡았으나 이정도 말해도 무방할 거라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대구에서 온 사람이야』
『어머, 대구에서? 어떻게 아는 사이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애?』
이번에는 혜경이가 부러운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