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神秘家(신비가) 토마스 머턴 - 그의 生涯(생애)와 信仰(신앙)의 道程(도정) ㊦
“우리가 천주를 발견하는 것은 천주께서 우리를 발견하는 것”
「트라피스트」까지 信仰(신앙)의 「七重山(칠중산)」 돌파
성당엔 갔으나 그리스도의 몸은 認識(인식) 저편에 숨어
G. 홉킨스에 결정적 영향 받고
이 「중세철학의 정신」 속에서 그는 위대한 가치를 지닌 하나의 진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즉 순수한 存在 자체요 結果인 神으로 向한 가톨릭적 信仰 및 철학에 對해, 커다란 존경심을 갖고있는 것이었다. 하여 그 책을 다 읽고나자 그는 아무 교회당에라도 찾아가지 않을 수 없는 홧홧한 渴望을 억제할 길 없어, 어떤 감독교 교회당으로 달려들어가서는 선채로 信經을 암송한다.
그러나 信經은 사실 그리스도교리가 너무나 요약돼 있었기 때문에 그로선 도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1936년 新學年이 되자, 그는 쉑스피어의 철학 및 단테와 중세철학의 직능을 연구해야했으며, 덧붙여 위대한 개종자인 알더스 허크리의 「목적과 수단」도 읽게 되었다. 또한 탐독의 時期였던 1937~8년동안엔 자신의 정신을 살찌게 해줄 새로운 양식을 찾아, 게걸스럽게 도서관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순수한 實存的 詩人인 윌리암 블레이크를 읽은 것도 그때였다.
그러나 독서에 沒頭하면 할수록 더욱더 절대한 信仰의 必要性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동시에 合理主義의 無用性과 無節操함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探索의 途中에서 힌두교 수도승인 브라마샤리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에게서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遵主聖範」을 읽을 것을 암시받는다.
그후 문제의 매듭이 하나하나 풀려지기 시작한 것은 냐끄 마리땡의 박사학위 論文인 「藝術과 科學」을 읽기 시작한 다음부터였다.
이윽고 1938년 9월 1일에 그의 학위논문이 完成되었는데, 그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가톨릭에 歸依하려는 마음의 기초도 대체로 完成되었다.
그것은 질송의 「중세철학의 精神」을 읽기 시작한 이후부터인 1년반 남짓한 세월동안이었고 그동안 그는 최고영광의 단계까지의 종교적 體驗의 모든 外觀과 可能性을 수容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자기 全生을 神에게 헌납하고픈 熱聖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직 끝나지는 않아서 위스키 소다나 스스로의 幻覺으로 인한 愚몽에 빠질때가 없지 않았지만 가톨릭교회로 향한 매료는 그런 모든 것 보다 항상 强烈했다.
그러던 차에 어떤 일요일이 되자 그는 보통때처럼의 출하기를 단념하고 처음으로 미사참예할 것을 결심한다. 지금껏 사실 많은 교회당에 들어가봤지만 아직 미사에 참례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그가 미사에 대해서 무엇을 알아들을 수 있었겠는가.
벽돌로 지어진 작은 성당에 들어갔으나 「그리스도의 몸」은 당시의 그로선 도무지 인식할 수 없는 저편에 숨겨져 있을뿐 기도는 커녕 마치 미술관에나 드나들듯 찾아다녔던 이태리와 프랑스의 모든 성당만이 회상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당이라는 같은 장소에 모여 結束돼서는, 그들 상호의 現存보다는 神의 現存을 더욱 意識하고 있다는 하나의 眞理만은 그의 靈魂을 꿰뚫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미사가 반쯤 진행되었을때 그로서는 제단위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더이상 이해할 수가 없어져서 반사적으로 밖으로 뛰쳐나와버렸지만, 어쩐지 生의 기쁨과 만족으로 하여 그야말로 幸福한 마음이 되는 것 같았다.
이어서 그는 조이스를 읽었는데, 그의 정신이 最終的인 쇽크를 받은 것은 프로테스탄트 詩人인 홉킨스를 읽고나서였다.
갑자기 그는 스스로의 魂 속에 무엇인가가 극심히 동요하고 있음을 느낀다.
『너는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어찌하여 아직도 우물쭈물하고 있단 말인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속을 그는 항거할 길 없는 內的인 힘에 몰려 달려나간 그는 포르 神父를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신부님, 가톨릭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비로소 자기가 상상할 수 있었던 모든 것 보다 더욱 준엄하고 가파른 시련으로 첩첩히 싸인 높은 「七重의 山」 기슭에 당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조금도 懷疑하지 않고 자기가 닦아나아가야할 모든 上昇의 德을 수행하려 했으며 그것이 1938년, 그의 나이 26세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켄터키」 「제세마니」의 트라피스트회서 첫미사를 봉헌한 것은 1949년 3월 26일 그의 나이 34세때의 일이었고 이후부터 그는 「루이 修士」로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神과 함께 거닐어 神이 그를 당신 안에 감추셨으니 우리는 이제 더이상 그를 볼 수가 없구나.』
즈네즈의 詩句로 그를 추모하면서 마지막으로 깊은 명상의 神秘 속에서 그가 조용히 일러준 말에 귀기울여 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우리가 천주를 발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천주께서 우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이 어디있으며 무엇인지 조차도 알 길이 없으므로 천주를 찾겠노라. 하늘로 갈 수도 없다. 천주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우리를 찾아내셔야 한다. 임은 어디서나 당신 뭏나한 現實에서 우리를 내다보시며 임이 우리를 보심으로써 우리에게 보다 높은 實在를 주시고 그안에서 우리도 당신을 발견하게 한다. 임이 우리를 아시는 만큼 우리도 임을 알고, 임을 명상함으로써 임이 임을 명상하는데 參與한다. 천주께서 우리안에 당신을 발견하셔야 비로소 우리는 명상가가 된다. 그순간 임과 우리의 接觸点이 터지고, 우리는 마음의 중심을 뚫고 나가서 비로소 永遠에 進入하게된다. 천주께서는 존재하는 만물안에서 정말 당신을 알으신다. 임은 만물을 보시며, 만울이 存在하는 것도 임이 그것을 보시기 때문이다. 만물이 좋은 것도 임이 그것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요, 만물에 대한 임의 사랑은 그것들의 內在的善을 이룬다. 임이 그안에 보시는 價値는 곧 그것들의 價値며 임이 만물을 보시고 사랑하는 정도로 만물은 임을 反映한다…』 (옷셀바또레 로마노誌에서) (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