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 순교자 시복을 경축하는 강연회가 기보한 바와 같이 서울·부산·대구 등지서 열렸던바, 다음은 전국 가톨릭사도연합회장인 유홍렬 교수의 강연 요지를 간추려 본 것이다.
1784년 南人학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전파된 천주교는 1887년에 억지 종교자유를 얻기까지 103년간 무서운 박해를 겪어야 했다.
공적으로는 그 마지막 대박해인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들 중 24위가 지난 10월 6일에 시복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인바 이제 이 박해의 遠因과 병인교난의 近因을 밝혀 두고자한다.
1801년의 辛酉박해를 비롯한 4차의 대박해는 무엇보다 제사문제 시비를 그 첫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당시 유교사상에 젖은 사회상을 감안해보면, 미신이라 배척하여 신주(位牌)를 모시기를 거부한 행위가 어느 정도의 물의를 자아냈을까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역사적으로도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사조나 개혁들이 인습의 큰 배격을 받고 비록 일시적이긴 해도 규제받은 사실은 분명하다.
다음에 들수 있는 것은 영조때 사도세자 사건이 빚은 時僻派間의 黨爭이다. 사도세자의 아들 正租를 동정한 時派(南人)와 사도세자 모함에 가담한 僻派와의 알력은 正祖사후 정권을 잡은 貞純王后의 南人거세책으로 번졌다.
이에 뚜렷한 구실모색으로 邪學을 신봉한다는 미끼삼아 1801년 辛酉박해를 시작했으니 이후 100여년간에 걸쳐 1839년 己亥박해, 1846년 丙午박해, 1866년 丙寅박해를 당했다. 이는 한결같이 時僻間의 싸움에 천주교가 말려들어 억울한 탄압을 받은 것이다.
셋째로 우리가 묵과할 수 없는 것은 鎖國政策의 결과다. 지나친 慕華思想은 철저한 西洋배척으로 바뀌어 외국인 선교사의 활동을 배격했다. 辛未·丙寅洋擾의 손쉬운 진압은 대원군 섭정의 위세를 올려주었고 결과 척화는 더욱 강화되어, 서양전래의 천주교는 심한 눈총을 샀던 것이다.
이제 병인교단의 近因을 알아보자. 1860년경 제정 러시아가 「우라디보스톡」港 개설하고 南進策을 쓰자 궁지에 몰린 대원군에게 승지 南종삼은 묘안을 제의했다.
당시 활동 중이던 프랑스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 영국과 화친하고 이 힘을 빌어 러시아를 막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張 주교가 마침 황해도를 순방 중이었으므로 미처 상경치 못하고, 이에 맞추어 북경으로 떠난 동지사 일행은 「연경에서는 서양인을 잡아 죽인다」는 편지를 보냄에 분노한 대원군은 1866년 초부터 전국적인 대박해명을 선포했다. 또 한가지 가까운 예로는 경복궁 재건을 서두르던 조정이 재정난에 봉착한 때문이다.
대원군은 성당신축기금으로 준비하고 있던 외국선교사들의 재산에 눈독을 들이기에 이르렀고, 이는 곧 엉뚱한 재산몰수로 발전했다. 이렇게 시작된 탄압은 1871년 대원군 은퇴시까지 계속되고 1만여명의 희생을 가져왔으니 이것이 곧 병인대교난이다.
正祖재위시는 정조의 宋 대비(마리아)가 천주교인인 탓으로, 그리고 고종조에는 천주교 신자이던 유모에게 자란 탓으로 한때 천주교는 흥했으나 대원군의 병인박해가 빚은 참상은 실로 무자비한 것이었다. 결국 이로 인해 대원군은 실각되고 1887년 마침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전후 수만명의 공적인 박해의 순교자(私박해까지 합하면 훨씬 많다) 중 우리는 103위의 복자를 가졌으며 대원군의 부인과 그 손자인 의친왕 그리고 영친왕도 마침내는 입교하게 되므로써 천주교는 결국 승리하고만 것이다.
유홍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