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뗄 大主敎(대주교)와 뮤뗄 文書(문서) ②
능통한 한글 · 漢文(한문) 실력으로
敎會(교회), 政府公文(정부공문) · 연락문 · 청원문 · 新聞(신문) · 광고 · 書翰(서한) · 訃告(부고) · 전보 등
蒐集(수집) · 分類(분류) · 保管(보관) 1만3천여 件(건)
王朝實錄(왕조실록) · 재판기록 뒤져
79位(위) 殉敎史(순교사) 밝혀 諡福(시복) 추진
도시락 · 徒步(도보)로 古籍(고적) 섭렵
李王職(이왕직)도서관 찾아 4년
뮤뗄 大主敎의 학문적 공헌을 밝히기 위하여는 먼저 그가 얼마나 진지한 학구열(學究熱)을 가졌던 분인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대주교는 프랑스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말에 능통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동양인에게도 어렵다는 한문(漢文)에 매우 정통한 분이었다. 한문으로 된 공문(公文)은 물론 우리 역사의 고기록(古記錄)을 무난하게 읽어 내려갔으며 그 뜻을 파악하셨다.
조선교회사에 영롱하게 빛나는 수많은 순교자의 얼을 전세계에 현양하기 위하여 순교자시복사업(殉敎者諡福事業)에 큰 공허을 하신 대주교님은 그 순교자들의 사실(史實)을 조사함에 있어 몸소 한국의 고적(古籍)을 섭렵하셨다.
1921년 경에는 당시 이왕직도서관(李王職圖書館) 깊숙한 서고(書庫)에 쌓여 있는 귀중사료(貴重史料)를 뒤지기 위하여 무처이나 노력하였다. 전차도 없던 때인지라 걸어서 도서관에 일참(日參)하였으며 먼지속 어두운 서고에서 왕조실록(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추안(推案=재판 기록) 등의 관변측사료(官邊側史料)에서 순교사실을 밝히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시간이 아쉬워 지참하신 도시락을 사고내에서 드시고 계속 사료를 읽었으며 석양이 내려 어두워질 때야 아쉽게 도서관을 나서곤 하였다고 전한다. 주교관 그의 집무실은 漢籍과 각종 기록이 항상 널려있었다 한다. 1925년의 명예로운 79위 복자 시복식은 학자 뮤뗄 대주교의 학문적인 노력이 있었음으로써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뮤뗄 대주교는 79위 복자 시복식을 기하여 그가 1894년 우연한 경위로 입수한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1801년 신유박해때 충청도 배론(舟論)땅에 은신한 양반교우 황사영이 조선교회 재흥책을 제시하고 북경주교에 원조를 요청한 밀서)를 직접 프랑스말로 옮겨 이를 인쇄하여 유럽 각지에 살포하여 우리 민족의 뜨거운 신앙을 만방에 증거하셨던 일도 또한 유명하다.
한편 뮤뗄 대주교님의 학문적 공헌으로 특기할 또 하나의 일은 모리스 쿠랑(MAURICE COURNST)이 편저한 조선서지(朝鮮書誌) 편찬에 적극 협조한 일이다. 조선 고(古)도서 다수를 해제(解題)하여 유럽학계로 소개하고 유럽인의 한국연구를 위한 「가이드 북」으로 많은 학문적 공헌을 한 조선서지 가운데 교회관계 서적은 뮤뗄 대주교께서 고증(考證) 주석(註釋)하셨던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이상과 같은 업적 이외에 학문적으로 중시되어야 할 또하나의 귀중한 자료가 이제야 세상의 빛을 보게되었으니 그것이 곧 뮤뗄문서(MUTEL文書)이다.
뮤뗄문서랑 뮤뗄 주교에 의하여 수집 보관된 각종 문서를 일괄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총 13451건에 걸친 방대한 것으로 그중 12164건은 구문관계(歐文關係 羅 · 佛 · 英 · 獨 · 西 · 伊語)로 된 문서이고 1287건이 동문관계(東文關係 한글 漢字 國漢文 · 日文)으로된 문서이다.
문서의 종류는 실로 다양(多樣)하다. 교회의 공문, 지시문, 연락문, 진정문, 호소문은 물론, 관청간의 공문, 교회로 보내온 공문, 관청에 대한 개인 청원문이나 개인간의 서한, 소개 명함도 있고 신문, 전보, 초대, 부고, 광고 등 가지각색이다.
이러한 다양한 내용이 그냥 아무렇게나 수집 소장된 것이 아니다. 자기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거나 간접적인 관계에서나 한국천주교회사와 관계되는 문헌과 한국정치사와 관계깊은 문서들이며 그것이 1886년부터 1910년까지 해마다 교회관계와 대외관계로 양분하여 견고한 함속에 보장되었다.
원래 이 문서는 빠리외방전교회의 서울교구 사목권이 노기남 주교에 이양되던 일제 말기에 우리교회 당국자에 이관(移管)되어 명동주교관 창고 깊숙히 간직되어 내려왔던 것이며 1964년 가톨릭대학 부설기관으로 한국교회사연구소(韓國敎會史硏究所)가 개설될 때 다른 사료들과 같이 연구소로 이관됨으로써 비로소 학문적 각광을 받게되었으며 현재는 양화진(楊花津)의 순교자기념관(殉敎者記念館) 내의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수장되어 있다.
일부는 이미 정리가 끝났고 구문관계는 아직 그 정리조사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귀중문서가 남아 앞으로 우리역사연구에 좋은 사료가 될 수 있는 학문적 배려(配慮)는 오로지 그의 해박한 한문실력과 진지한 학구열, 그리고 한국을 사랑하는 열렬한 마음이었음으로써 나온 것이라 하겠다. <계속>
이원순(서울대학교 사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