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話(대화)를 위한 「시리즈」] 慈悲(자비)에 관하여 ④
부처 · 衆生(중생)이 佛心(불심)으로 연결되듯 宗敎人(종교인) 慈悲(자비)로 뭉쳐야
佛心(불심) 곧 보리心(심)은 지혜와 慈悲(자비)
한마음 이루는 길 마음이 마음 안에서 마음을 啓發(계발)하고 마음간의 壁(벽) 없앨때
발행일1969-02-02 [제654호, 2면]
경전안의 모든 말씀은 하나도 자비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없다. 또 8만가지로 풀이하신 전리에의 門이라고 불리어지는 말씀의 동산을 더 散策해 보자. 法華經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이 가장 깊이 설명되어진 經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안에서 불타는 자비만을 말씀하신다.
『모든 衆生은 다 내 아들이다』(一切衆生皆是吾子)하였고 또 『如來(즉 온전히 깨달은 佛)에게는 大慈悲가 있다.』 『如來가 앉아계신 居室은 모든 衆生에 대한 大慈悲心이며 如來가 입으신 옷은 柔和忍辱하는 마음이며 如來가 앉으신 자리는 모든 事物에 대한 執_이 끊긴(一切法空)자리이다.』라고 하였다. 이 마지막 말은 요컨대 如來, 즉 불타가 지혜롭고 자비로운 마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불교는 마음의 宗敎라고도 할 수 있다.
필자는 불교를 가리켜 나만을 생각하는 마음들이 그 마음안에서 마음을 啓發하며 마음과 마음과의 벽을 헐면서 한마음 되는 길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다.
觀音量壽經에도 『佛心, 즉 부처님 마음이란 다름아닌 大慈悲 이것이다』라고 한 말씀이 있는데 자비로운 마음 없는 佛이란 결코 佛일 수가 없는 것이다. 大乘莊嚴經論이란 다소 後代의 論書에는 다음과 같은 詩가 있다.
『뿌리는 慈悲의 물로 인해 생기고, 줄기는 기쁨을 넓힐때 뻗네, 생각이 바르니 가지가 늘고, 좋은 소원이 이어져 잎이 자라며, 안으로 조건이 갖추워지니 꽃이 피고, 밖으로 조건이 갖추워지니 열매가 맺네』(根生以慈潤 경탁以樂廣念正則增技 願續測長葉內綠成爲華 外綠成爲果)
이 詩는 사람이 사림되는 길, 다시 말하면 사람이 그 마음을 이기주의적인 각축대립의 세계에서 건져내 사람들끼리 一心同體가 되도록 하는 修道의 要諦를 나무에 비하여 말한 것이다.
옛부터 인도에서는 佛타를 보리수로 표현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힘으로써 나무가 나무 구실을 다하여 그 生命을 온전히 하는 과정에 있어서 근본적인 출발이 다름아닌 慈悲로운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뿌리없는 나무가 살 수 없음은 물론이다.
종교인이 가져야 할 첫째가는 마음이 慈悲라는 것을 강조한다면 그릇되었거나 지나친 일일까? 불교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누구나 다 同等하게 天職의 素質로써 받아기자고 태어났다고는 가르치지 않으나 누구든지 이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음은 부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비로운 心性이 태어날때부터 진하고 어떤 사람은 또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자비의 마음씨만은 누구나 타고났음을 믿는 것이 불교의 근본 견해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慈悲行에 여러가지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무시하지 않는다. 낮은 慈悲行도 있을 수 있고 높은 慈悲行도 있을 수 있다. 낮다 높다 하는 것은 完全하냐 不完全하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慈悲를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기로 하는데 이것은 위의 사유 때문이다.
사람과 다른 衆生 사이를 자비로써 관계지운다. 그것을 「衆生을 綠으로 하는 자비」(衆生綠)라고 말한다.
衆生이란 말은 비단 人間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衆生의 우두머리格인 부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몇가지 두드러진 인간적 조건이 있다.
色(물질적, 형태적 조건) 受(感受 기능), 想(想像作用), 行(行爲), 識(결코 단순치 않고 層階的인 意識 · 認識 기능)
즉 누구가 어떤 다른 사람에게 그 육신상 고통을 덜어주려고 도움을 베푸는 일이있다면 그것은 衆生을 綠으로 하는 慈悲라는 것이다.
위에 말한 인간적 조건의 어느 면에 있어서 베풀어지는 자비이건 그 것은 모두다 이렇게 분류될 성질의 것이라는 말이다.
베풀어 주는 자란, 의식이 있ㄱ 베품을 받는 자란 의식이 있는 그러한 자비를 두고 한 말이다.
父母나 妻子, 親戚, 또는 그밖의 누구이건 그사람을 보고 베푸는 자비가 바로 이 첫째 부류의 자비이다. 이것은 아직도 낮은 정도의 자비이다.
둘째 부류의 慈悲는 「法을 綠으로 하는 慈悲」(法綠)라고 한다. 그것은 衆生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을때, 그 물건을 베풀어 주는 경우 그러한 자비행을 일컫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보고 오직 그 貧窮으로 인한 고통을 덜어주어야겟다고 생각하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인색한 마음, 애석한 마음없이 집착을 버리고 奉仕하는 것을 「法을 綠으로 하는 慈悲」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아직 베 풀어 주는 물건에 대한 의식이 있다.
셋째 부류의 자비를 그러한 「綠이 없는 자비」 즉 無綠의 慈悲」라고 한다. 이것은 또 「如來를 綠하는 자비」라고도 부른다. 大般열반경에서는 이 세째부류의 자비를 「法相 및 衆生相에 住하지 않는」 慈悲라고 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내가 지금 누구에게 무엇을 가지고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의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걸리는 마음없이 저절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法이란 事物을 말하는 것이요, 相이란 愛著하는 의식을 두고 한 말이며, 住한다는 말은 하잘것 없는 無常한 것에 매달려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 次元의 자비는 慈悲라는 의식마저도 超越한 사랑의 실천을 두고 하는 말이다. 心地觀經에 있는 『내가 베풀어 준다는 생각, 누구에게 베풀어 주었다는 생각, 무엇을 베풀어 주었다는 생각, 이런 따위의 생각이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미래에도 없으리니 저희들은 이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어디에든지 안계신데 없으신 부처님께 영광을 드리나이다.』
(能施 所施及施物 於三世中無所得, 我等安住最勝心 供養一切十方佛)란 귀절 속에 우리는 그가 장차 次元 높은 無綠의 자비의 面貌에 섭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다음기회에 이 자비 불교의 다른 도리와는 어떠한 관련을 가지는가를 설명해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