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承前> 이상의 제 사실은 전부가 아니지만 선교활동을 위축케하 는 주요원인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러한 난관은 종교적 다원성(多元性)을 인정하시는 하느님의 뜻일 것이고 그러한 종교의 다원성도 구세사의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교회는 성서가 말한 「작은 무리들」(루까 12·32)에 지나지 않으며 「작은 무리들」로 남아야한다는 이론을 뒷받침해준다고 주장하는 신학자까지 있다. 그러나 이 학설은 성서의 모든 교리와 반대된다고 하겠다. 하느님의 백성은 보편적이며 모든 민족 모든 인간을 포괄하도록 되어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한 구원에 불리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구원되기로 불렸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교회헌장 제13조와 제7조에서 『사람은 다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에 참가하도록 불리웠다. 그 때문에 이 백성은 단일 유일한 것으로 존속하면서 전세계를 향하여 또 모든 세대를 통하여 확장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의 이 보편적 일치는 세계적 평화를 미리 표명한 것이며 촉진하는 것이니, 모든 사람은 이 일치에 불리웠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그 누구에게든 그 처지대로 신앙을 전파할 의무가 부과되어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면 왜 20세기가 다된 오늘날 그리스도교신자들은 아직 소수이고 세계인구의 3분의2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 3분의1조차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동방정교회로 분열돼 있지 않는가 하고 어떤 이는 의혹을 품을 것이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느님의 구원의 뜻과 그리스도의 명령이 합치하지 않은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 고통스러운 질문에 대한 회답은 단 하나뿐이라고 생각된다. 즉 그 책임은, 태만하고, 희생을 두려워하고, 미신자의 구령에 무관심함으로써, 만민에게 구원의 「메시지」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불순종한 어제와 오늘의 신자들인 우리들 전체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사도직의 긴급함을 통감하고 갖은 희생을 무릅쓰며 헌신하여온 교역자나 신자가 없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사만 보더라도 우리들의 신앙의 선렬들은 얼마나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에 이바지했으며 순교로써 믿음을 증거하였던가. 그들은 자발적으로 복음의 가르침을 도입해오고 교역자 없이 신자들만으로 이루었던 한국의 초대교회는 정말 세계포교사상에 유례를 볼 수없는 업적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교회의 가장 순수한 영광이며 그들의 영웅적 덕행은 하느님 대전에 우리들의 냉담을 보상해주고 있다. 포교와 순교의 서사시(敍事詩)는 아마 가톨릭교회사의 기록중에서도 가장 찬란한 「페이지」일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복음전파라는 거대한 과업에 비하여 교회 내에는 포교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자의 수가 너무나 적고 신자들의 포교열마저 날로 점점 식어 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오늘날 선교활동은 새로운 정열을 요구하고 있다.
선교활동은 전 교회의 「열성」에 달렸다. 선교란 교회가 지닌 열성의 능력의 표현인 것이다. 이 열성은 곧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 하셨지만, 인간의 역할을 통해 구원하시려 하셨다.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인간에게 미치기 위해서는 형제들을 구원하는데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적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사랑」은 곧 「실천」이다. 교역자나 신자나 전 교회가 총동원되어 직접적으로는 복음을 전파하고 생활로써 증거함으로써 현세를 그리스도교화하며 사회 안에서 「산누룩」의 역할을 하고 간접적으로는 포교사업을 위한 물질적 협조가 있어야할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구원받아야하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기위해서 포교는 아직도 필요한 것이다. (끝)
鄭銀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