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축강연 抄(초)] 한국과학사상에서 본 천주교
가톨릭思想(사상), 西學(서학)과 함께 傳來(전래)
근대화·신앙생활기틀 이룩 코
丁茶山(정다산) 등 과학실용성 탐구에 헌신
조선 근세에 있어 천주교가 전래될 때 학자들이 「르네쌍스」기의 서구과학 기술에 큰 관심을 갖고 연구, 이해했음은 우리 과학사상 주시할 사실이다. 우리 조상들은 서구사상(종교 및 과학) 수용에 있어 어디까지나 「내것」에 기틀을 두고 「새로운 것」을 다시 「내것」으로 매만져 調和 및 再創造의 길을 더듬어 왔음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조선후기에 있어 明末清代의 서양과학기술(중국에 와있던 서양신부의 전래)이 천주교와 함께 「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을 때 전통적인 중국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의 기반이 되어왔다. 이는 곧 과학기술의 합리성을 추구, 이해하고 유교윤리관 내지 전통적 세계관과 비교되어 새로운 학문(實學)을 낳았다.
南人들의 선각자인 실학자 李光은 「天主實義」라든지 세계지도 등을 이 나라에 소개했고.
許균, 柳夢寅 등도 천주교 사상을 전래, 그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왔다. 星湖 李익에 와서 西學지식은 전면적인 현실이해의 학문으로 번져 그 합리성이 높이 평가되고, 이들을 유교사상과 조화시켜 취사선택하여 보다 높은 합리성을 西學에서 인정하게 되었다. 星湖는 인조때 明에 다녀온 鄭斗源으로부터 「치력상기」 「천문략」, 「원경설」, 「職方外紀」, 「천문도 등과 「천리경」, 「자명종」, 「포화」 등을 얻어 연구하고 이들의 보관을 타이르고 「태서수법」에 따라 저수지를 만들도록 건의도 했다. 한편 「천주실의」와 「七克」을 통하여 얻은 사상은 그 문하생에게 끼친바 많았다. 이중 이가환, 안정복, 권철신, 권일신 등 실학자들은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를 하는 동안 이벽, 이승훈, 權씨 형제와 丁씨 三兄弟(若銓 若鍾 若용)들이 이를 신앙하고 있었다. 이것은 호남지방으로 전파되고 1791년에는 珍山事變을 낳기까지 했다.
결국 이 신앙은 반대파의 도전을 받았고 珍山事變시 규장각 소장 西學書들이 소각되었다.
서학의 이해와 천주교사상의 전파는 1801년 辛酉박해(순조원년)를 낳고 이 박해사실을 北京 주교에게 전하려던 「黃사영 백書」가 제작되었던 바, 이 백書에 의하면 李벽, 李가환 등이 「天學初亟」을 읽었다고 하는 것을 보아 이무렵 많은 종교서적, 과학서적들이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서에는 천문·수학·역학·측량·수리·지리 등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과학기술은 茶山에 의해 더욱 실용화되었는데 그가 31세때 규장각에서 正祖의 水原城 공사에 내놓은 城說은 중국의 「기구도설」에 의한 공사과정과 기재들을 사용토록하고 그로 인해 많은 경비절약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茶山文集에 光熱輪에 대한 상세한 논의가 있고, 37세 때는 황해도 谷山부사로 있으면서 일반의 種痘치료를 위해 「麻科會通」을 짓는 등 그의 과학 실용화는 특기할 일이다. 자신의 신앙문제는 명시하지 않았으나 그의 학문적인 일생은 오로지 西學의 實用化에 있었다.
이러한 과학에 대한 연구 및 실용화는 그 학문적 합리성 내지 현실성을 발견한 것으로 이 나라의 근대화와 (비록 르네쌍스 시대의 것이긴 하지만) 그리고 천주교신앙 생활화의 좋은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홍이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