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報本儀禮(보본의례)와 宗敎信仰(종교신앙)] ① 虛禮(허례)의 害毒(해독)
墨子(묵자)의 사상은 기독교 사상과 공통
「君子之中庸也(군자지중용야)는 君子而時中(군자이시중)」
禮制(예제)의 시대적응은 程朱(정주)의 정신
「양반은 제사덕분에 산다」고 했으나 제사 때문에 망했다
生者(생자)에 대한 禮(예)는 亡失(망실)하고 死者(사자)에 대한 禮(예)만 발전시켜
나는 7代小宗家 3代俱侍下에서 生長하여 年中에 奉祭祀와 6突의 3年喪을 경험해 오는 동안 喪祭禮의 번폐와 해독을 통감하였다. 그것은 거의가 假飾이요, 또한 낭비라, 이로 인하여 儒家가 쇠망되었고 농촌이 피폐되었다. 이런 허례는 생산을 위축시키고 소비를 가중하여 경제적으로 빈궁에 빠지게 하였으며 실질적인 토의에는 관심하지 않고 가식적인 예절에만 힘써왔으니 어찌 민심의 순화·선도를 바랄 수 있었겠는가. 물질적으로 낭비하고 정신적으로도 부덕하게 되는 二重의 손해를 가져오는 허례의 폐습은 실로 우리사회의 고질이라 이것을 救治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7년전에는 「報本儀禮革新論」을 著했고 재작년에는 「報本儀禮의 要目과 理論」을 述했던 것이다.
묵子는 원래 孔子의 학도로서 儒道를 배우다가 그의 喪葬의 體節이 너무도 번잡해서 생업에 해를 끼침이 큰 것을 깨닫고 「節葬」 「非儒」 등의 저술을 통해서 儒家의 厚葬久喪을 배격하고 「背周道而用夏政」(周代의 묵은 이념을 버리고 夏代의 새로운 제도를 택함)하여 별도로 一家의 思想을 창건 하였던 것이다. 유가의 지나친 喪葬 예절은 재물의 허비와 생산의 감쇄와 사람의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인구의 증가까지도 저해하는 것이라고 묵자는 비난하였다.
묵子시대에 벌써 그만큼 심하였던 허례의 폐습이 2천3백년을 지난 오늘에 와서도 존속하고 있으니 이를 배격함에 있어 나는 묵子와 뜻을 같이 한다. 뿐만 아니라 묵子의 天志, 力行, 交利, 節用, 博愛, 희생 등의 정신에 있어서도 나는 묵자와 동감하고 있다. 따라서 묵자의 사상과 공통하는 기독교사상에 공명하게 되는 것이다.
무릇 예절이란 법률과 같이 인생을 위한 규범이니 그것은 반드시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으면 도리어 사람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程子는 『行禮는 옛것에만 구애될 수 없으니 이러므로 時體의 기풍과 같지 않을 수가 없는 즉 古禮와 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聖人이 나시더라도 반드시 損益(加減)을 하실 것이다』하였고 朱子 『體制는 時代性이, 중대한 것이니 聖人이 다시 나시더라도 반드시 지금의 禮에 따라서 그 中용을 취할 것이며 옛날의 번폐스런 예절에만 따르지 않을 것이다. 孔子께서 先進을 따랐음도 아마 이러한 의미에서였을 것이다』고 하여 시대정신에 맞도록 程朱는 예제를 개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예절을 그 후 천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이는 程朱가 만든 예절을 고수함으로써 오히려 程朱가 말한 예법의 정신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詩經」에도 「人而妄禮면 胡不천死리오」하였으며 「중용」에도 「君子之中용也」 君子而時中」(군자의 중용이란 것은 시대정신에 적용함)이라 하였으니 예절의 제도는 사람을 위해서 時中으로 변화하는데서만 그 생명이 있는 것이다.
孔子는 「聖之時者也」(성인도 시대에 따른다)라 하여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인간에 유익하도록 禮制를 개정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殷나라에서는 夏나라의 禮를 받았으나 수정을 하였고 周나라에서는 殷나라의 體를 따랐으나 또한 수정을 가하였음은 주지할 사실이다. 이러므로 시대에 따라 마땅히 예제의 고침이 있었어야 하겠거늘 우리東國의 先儒들은 宋代의 程朱禮制를 조금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5백년을 시행하여 왔으며, 서구의 문명과 사조가 들어와서 일대변혁이 일고 있는 현대에까지 이 고풍예절을 그대로 맹종하고 있으니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라 생각된다. 이는 마치 한여름에 입던 베옷을 추운 겨울에도 그대로 입기를 고집하는 것과 같은 儒家들의 잘못된 인습으로 인한 폐단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程朱는 古禮를 時代에 맞도록 개정하였으니 그들은 哲學的 사상이 있었던 것이나 東儒는 時代가 변해도 古禮를 묵수하였으니 그것은 哲學의 빈곤이라 하겠다. 先儒의 문집을 보면 대개는 만 祭書禮 등의 문예작품이고 간혹 哲學的인 저술이었다면 그것은 理氣, 禮說인데 인간사회에 유익할 수 있는 무슨 진리의 탐구라기 보다 宋儒들이 말한 것을 그에 맞도록만 설명을 가했을 뿐이며 아무런 새로운 哲學사상이 없다. 따라서 나는 東儒의 학문에는 그다지 흥미를 갖지 못하였다. 우리 先儒들은 禮學을 숭상하였으나 그것은 오직 朱子의 「家禮」만 기준으로 하였으며 때문에 五禮(吉·凶·實·軍·嘉) 중에도 生者에 대한 예는 거의다 망실하고 死者에 대한 禮만을 전문으로 연구하여 喪祭의 방면으로만 발전시켜 왔다. 그래서 四代의 忌祭, 역대의 墓祭, 四節의 時祭, 조埋祭, 吉祀祭, 不遷位祭, 書院祭, 鄕校祭, 그리고 喪事에는 한번, 葬事에 제사는 열번이고 3年喪 중에는 大祭가 세번, 小祭는 50회나 되는데 자기집 제사뿐 아니라 남의 제사까지 합쳐서 실로 무수한 제사가 있으니 선비일생의 사업이란 오직 제사지내는 것뿐 이었다. 그래서 『양반은 제사덕분에 산다』고 했으나 사실은 양반이 제사 때문에 망했다고 할 수 있다.
어디 옛 經書에서 祭만 지내라고 했던가? 「禮記」 祭義篇에는 「祭不欲數數則煩 煩則不敬 祭不欲硫 硫則怠 怠則忘」이라 하여 天道에 맞추어서 年中四時에 四祭만 지내라고 하였던 것이다. 儒道中용의 哲理로 말하면 「過猶不及」이라 祭만 지내는 것은 안 지내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이를 非禮之禮라고 하는 것이다.
力學의 원리를 보면 作用과 反作用이 있으니 한쪽 極端으로 가던 것은 반드시 다른쪽 極端으로 가는 법이니, 과거에 제사만 지내던 극으로 가던 것이 앞으로는 제사를 폐지하는 극으로 갈는지 모른다. 일제시대에는 「儀禮準則」을 제정하였고 군사혁명 후에는 국민운동에서 「표준의례」를 제정 공포하였으나 하나도 실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근일에는 朴 대통령의 지시로 정부에서 儀禮제정을 서두르고 있는 실정인바, 그것은 반드시 제사를 안지내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은 理性的 동물이라 力擧上의 법칙에만 지배될 수 없으며 우리는 오직 理性的으로 생각하여 중용의 大道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人生의 福利는 오직 중용의 大道에만 있기 때문이다. (계속)
柳正基(忠南大學院 교수·東洋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