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제 힘으로 알 수 있는 인생관과 그에 따른 윤리성도 스스로 발견해서 정확하게 표현한적은 인류역사상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에 있어서도 「인생은 수수께끼」란 말과 같이 많은 사람이 어두움 속에서 헤메고 있음도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외적으로 뿐아니라 내적으로도 이어받아서 전인류에게 생활로 전달하고 있는 「교회」안에서 비추어진 지능, 정화된 의지 및 교회의 산(生) 교도의 도움으로 올바른 관찰, 치밀한 반성 및 계시안에서의 확인 등을 통해 확고부동한 인생관과 속이지 않는 윤리지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은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지난 7월에 나온 교황 바오로 6세의 산제회칙은 여러가지 면에서 인공산제가 나쁘다는 이유를 상세히 밝혔다. 그러나 그래도 납득이 안된다는 소리가 아직도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그치지 않는한, 때와 장소와 각도를 달리해서 대화하는 것은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과학적 관찰, 철학적 고찰 및 신학적 보장에서 올바른 인생관을 치밀히 제시하고 거기 따라 인공산제의 부당성을 재천명하고서 나머지 보충은 질의 해답식으로 논의할까 한다.
①사람이란 완성도중에 있는 이 성적 동물임을 우리는 본다. 사람은 동물이면서도 동물을 초월한 영신적 요소를 지니고서 정신적인 활동을 통해서 인격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사람은 동물적인 육신과 영성적인 영혼으로 구성된 생명체로 태어나서 자기완성의 도상에 오르는 것을 우리는 관찰하며 또 그 완성역시 두가지면이 있음이 분명하다. 즉 우리주위에 있는 만물에서 동물적 영양을 취함으로써 육신이 성장하는 동시에 육신 및 다른 피조물들의 간접적 도움을 받아가면서 정신적으로 자기인격을 완성하도록 되어 있다. 다르게 말해서 지능과 의욕의 초물질적이요, 능동적인 활동을 통해서 사람의 영신적면도 자라게 되어있다.
이 영성적 성장 즉 완성이란 나 자신을 알고 나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알고 나와 하느님 및 다른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를 알고서 자기의 할 것을 다함으로써 인간으로서 되어야할 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짧게 말하자면 사람은 천주를 알아 찬미하고 공경하고 사랑함으로써 자기완성을 이룩하는 도중에 살고 있다.
한동안 이렇게 육신도 자라고 영혼도 자라다가 사람의 동물적 기능은 상실되고 영혼의 성장적 활동도 중지된다. 즉 이르는바 죽음이 온다. 여기서 사람의 동물적인 부분은 사라지고 영성적인 알맹이만 남는 셈이다.
이제부터는 완성도중의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종결된 신령한 인격체로서, 영신적 완성에 방해가 될 정도로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에로의 과도한 애착으로부터 이탈하는 데에 없을 수 없는 고통, 시련, 투쟁, 극기, 희생 등이 뒷받침하는 그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이 덤으로 주시는 성삼적 사랑속에 흡수합일됨으로써 위안과 평화의 행복을 누릴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만일 사람이 위에 말한 인생철리와는 반대되는 생활을 함으로써 되어야할 것이 못되었다면 그 영혼은 스스로 자신을 망친기형아처럼 실재가 본질과 상반되는 모순의 실존체가 됨으로써 죄악과 고통의 소유자요 지옥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이상은 인생관을 본질적으로 또 일반적으로 생각해 본 것이다. 아담한 사람의 경우에도 이 완성은 이루어져야 할 것이요, 또 원칙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②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사람이 단체로 자기완성을 이룩하게 하시고자 인간생명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남녀제도를 택하시어 그들이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룰 수 있도록 마련하시고 그 수단의 하나로서 성기능이란 것을 사람에 덧붙여 놓으셨다. 그런데 이 기능마저 위에 말한 일반적인 동물적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적절한 사용은 목적달성에 도움이 될 수 있고 부당한 사용은 인간전체에 해로우며 그것의 절제 또는 희생은 영성적인 인격완성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설계된 치밀한 섭리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부부의 사랑도 전체인간의 발전노선에서 정신적인 사람에로 상승하기로 되어있으며 또 그렇게 됨으로써 하느님과 사람으로 일합하는데 있는 인격완성을 공동으로 이룩하도록 되어있는 것도 명백하다. 따라서 신자부부의 참사랑과 참평화는 이러한 자연법을 어기는 일이 없이 만일 어겼으면 통회보속의 성사로 정화된 다음에 기쁨과 시련 고통과 극기 등을 통해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사적 생활과 인격적 건설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 철학적 및 신학적 의리에 맞는 참된 인생관 내에서의 결혼관이며 부부관이다.
그러므로 만일 위에 말한 인생철리와 부부윤리를 거스려서 직접으로 또 고의로 부부적 결합의 근본목적인 산출은 적극방해하면서 그 수단만을 택한다면 그것은 인생의 길도 부부의결 또 역행하는 것이 된다. 일평생 성사적으로 살겠다고 받은 혼배성사도 배신당한 셈이겠다. 즉 동물성이 이성적 인격완성에 도움이되는 대신 방해가 될 뿐 아니라 도리어 이성이 동물성에 봉사하는 것이며 사람이 스스로를 망치는 동시에 하느님께 범죄하는 것이다.
인류를 십자가의 길로 부활하는 영복에로 이끄는 어머니며 교사인 교회는 이를 묵인함으로써 인생의 본질을 저하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같이 완전한자 되도록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은 다 이러한 원리원칙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려움도 핑계도 소위 학자들의 반대도통하지 않는다. 영성적 생활의 초과학적 분석을 보게 될 때에는 다 투시하게 되리라.
양육과 교육의 부담이 벅차다고 생각될 때는 주기법으로 덕행을 더욱 높이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천국의 길은 좁고 험함을 묵상하고 고신극기 함으로써 십자가 생활, 순교생활, 동정생활에 참여할 것이다. 『세속이 인공산제를 자행하고 쉬운 방법을 제공하더라도 세속은 즐거워하고 너희는 설어워 하리라. 그러나 너희 근심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리라』(요한 16~20)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구할 것이다. (계속)
윤양석(예수회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