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오랫만에 자유로운 시간을 얻었다. 도착한 날부터 어제까지 꽉짜인 공식 「스케쥴」대로 쫓아다니다 보니 몸이 솜처럼 피었다. 「쇼핑」을 나갔다 「나포리」 구경을 간다 「오페라」에 간다 부산하게 서성거리던 일행들이 호텔을 나선다. 텅빈 호텔 「라운지」를 몇번 맴 돈다. 무엇을 할까? 낮잠을 잤다.
저녁에는 駐伊대사 유재흥 장군의 초대를 받았다. 며칠 안되는데도 김치생각에 입맛을 다시면서 대사의 「아파트」문을 들어섰다. 관저하나 없이 사는 한국의 교관의 고충이 짐작된다.
어제 저녁 「칵테일파티」에 참석했던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의 관저가 생각이 난다. 조그만 城主의 궁전 같았다.
金 대주교, 신임 馬山 張 주교, 백디오니시오 신부, 林진창 박사, 崔한흥 교수 그리고 劉 대사부처와 식사를 같이하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金 대주교는 이 자리에서 교황청 주재 상설 공관의 필요성을 말했다. 이번 행사 중에도 여러가지 뜻하지 않았던 고충이 있었나 보다.
7시 반까지 오라는 대사의 집에 도착한 것은 8시였다.
호텔에서 20분 미만이면 도착할 곳을 50분이나 걸려 도착했다. 정말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소위 「바가지」를 씌울 셈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운전수가 길을 모르는 듯 절절매었다. 걸어서 15분이면 갈길이 택시로는 한국 돈으로 3백원이 나온다.
10월 9일
일주일간의 피로와 더불어 뒤에 두고 온 聖都 「로마」를 빠져나오는 순례객들의 눈은 새로운 풍경을 찾아 부지런히 좌우로 선회한다. 그러다가 피로를 이기지 못해 하나둘씩 감겨든다. 얼마나 잤을까? 어느 산악 지방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태리가 자랑하는 「太陽의 하이웨이」가 물에 풍덩 빠져있다.
14세기의 聖者 五傷프란치스꼬의 고향 「아씨시」에 도착한 것은 점심시간이었다. 聖프란치스꼬. 이태리 말로는 「산 프란치스꼬」다. 「산 프란치스꼬」대성당구내에 있는 아담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성당참배를 했다.
대부분의 「로마」시내 성당과는 달리 「로마네스크」 건축이라고 하는대성당의 벽면에는 경탄을 금치 못할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들새와 물고기에게도 강론하는 프란치스꼬, 대죄 중에 죽은 죄인을 부활시키는 프란치스꼬는 순례단의 짙은 감명을 자아냈다. 이태리에서의 산 프란치스꼬는 우리 한국인의 상상을 뛰어 넘었다. 일행이 「로마」에 도착한 4일은 산 프란치스꼬의 축일 모든 학교는 수업을 중단하고 성인의 추억을 더듬고 있었으며 주요 건물 지붕에는 이태리의 3색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산 프란치스꼬의 축일은 이태리의 국경일이기 때문이다. (계속)
趙炳雨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