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찬 인생의 애원, 성모여 너 들으시니 읍소하는 우리에게 영원한 도움 되소서』(會歌 1절)
한국 최초의 邦人수녀원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1932년 6월 27일 바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축일에 평양 상수구里에서 창립됐고 38년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수녀원이다. 창설자는 당시의 교구장 모리스 (목) 신부였으며 초기에는 메리놀회 수녀들이 수련장의 역할을 맡아있다가 2차대전의 발발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메리놀회장 정은(메리 앙네다) 수녀가 수련장으로 피선, 초대명예원장이 되고 康 베드로 수녀가 뒤를 이음으로써 메리놀회와는 별도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경력을 들어보면 성모회는 사실상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연상케 하는 많은 고초를 딛고 자라왔다고 할 수 있겠다.
6·25동란이 터지기 한달전에 북한 공산당들은 본 수녀원을 빼앗아 36명의 수녀들이 俗服을 입고 뿔뿔이 흩어졌는가 하면, 院母 장 수녀마저 납치당했으며 평안남도 수녀들만 모여 1·4후퇴때 남하해서 부산 메리놀병원 한쪽에서 셋방살이를 하다가 5년에야 서울 흑석동에 母院을 두고 회원 115명을 갖게됐고 거기서 다시 현재 위치인 정릉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본 회의 정신은 관대성과 고결함이며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일치를 뜻하는 『마음을 위로!』를 그 표어로 삼아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규칙에 따른 청빈 · 정결 · 순명의 3대 허원을 지킴으로써 개인성화와 모든 타인의 구령을 위해 노력함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60여 성상을 성모회와 더불어 살아온 파물라 수녀(前院長)는 邦人수녀원으로서의 애로점에 대해 첫째로 경제적인 기반이 없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당하는 여러가지 고초도 고초려니와, 한 교구장으로서의 필요에 의해 창설된 수녀원인만큼 그 정신을 익히 물려받기도 전에 다른 교구장이 임명됨으로 해서 오는 정신적인 애로 등이 있었다고 대답한다.
현재로서는 유재국 신부가 지도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그런 애로는 별로 없으며, 경제적인 문제도 각 사업체의 경영 및 종사를 통해 충분히 자급자족이 된다는 것이다.
본 회의 활동은 직접적인 전교를 위해 본당일에 종사하고 간접적인 전교를 위해선 교육사업 및 고아원 · 영아원 · 보육원 · 양로원과 병원 등을 통해서 하는 것이며, 이러한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지원자들을 독일병원 등지에 간호원수업을 위해 보내기도 하고 도자기 · 공예수업 등도 받게하고 있으며 직업보도소나 학관 등을 계획중이기도 하단다.
공의회 후에 특히 애쓰는 점은 더욱 철저히 복음정신으로 돌아가 『그 생활이 모든 사람의 규율인』(성 암브로시오) 동정녀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청원하는 것이며 건강한 「리크리에이션」을 존중할뿐 아니라 회원 하나하나가 개방된 친목 속에서 화기애애하게 主의 사업에 헌신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란다.
말하자면 그것은 『수도생활의 쇄신 · 적응이란 모든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원천과 각회의 창립당시의 정신에 계속 돌아감과 동시에 시대의 변화하는 상황에의 적응을 내포하는데 있다』고 한 「수도생활의 쇄신 · 적응에 관한 율령」의 실천을 의미하는 얘길 것이다.
현재 158명의 회원(수련자 · 청원자 포함)과 14명의 지원자를 갖고 있는 본 성모회는 대지 1만5천평에 건평 1천2백평인 말씀한 本院을 가지고 있으며 파룰라 수녀의 병환으로 작년 6월에 이 요세피나 수녀가 총원장으로 취임했다 한다.
- 그런데 수녀님, 끝으로 수녀지원자들에 대한 한 말씀 해주십시오. 기자의 질문을 받은 파물라 수녀는 할머니라기엔 너무도 천진하고 숫돼보이는 소녀같은 눈빛으로 차근차근히 대답해 주신다. 『수녀가 되려면 첫째로 명랑해야 해요. 스스로를 타에게 열어놓을 수 있는 솔직함과 스스로의 좋은 표양으로 그리스도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 자기를 아끼지 않고 전적으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어요』
결국 좋은 主婦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좋은 修女도 될 수 있다는 얘기. 불편한 몸을 무릅스고 문간까지 친절히 배웅해 주시는 할머니 수녀님의 그 부드러운 미소 저멀리 「스카이웨이」위를 夢幻처럼 아득히 자동차가 한대 미끄러져 간다. (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