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宗敎觀(종교관)] ⑱ 自己反問(자기반문)에서 끊임없는 自己超越(자기초월)
종교인은 現實(현실)에서 변모된 神(신)의 모습 찾아야
발행일1968-11-10 [제643호, 4면]
사람은 手足등의 生理的存在만이 아니고 그 存在를 뚫어볼 수 있는 存在를 志向하는 존재이기도하다. 이런 존재이기에 『사람은 萬物의 靈長이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詩篇의 詩人은 이 자랑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이 관대!」하냐고 反問했다.
時代마다 그 時代의 깊은 밑바닥에 呻吟·憤怒·괴로움·불안 등은 이루 헤아릴 수없는 것들을 表現하는 形式이 깔려있다. 이 形式을 「게루니카」 畵面에, 피카소는 담았다. 총에 맞아 괴로움에 날뛰는 말(馬), 눈이 찢어질 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여인, 죽은 애기를 껴안은 어머니, 부러진 칼을 든 兵士, 살찐 소(牛)-등을 검은 색과 흰 색과 灰色의 억제된 색조로 그린 畵面이다.
스페인 內亂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37년 4월 28일 內亂에 개입한 「나치스」 독일이 「바스크」 地方의 無防備小都市 「케르니카」에 연습을 가장하고 갑자기 無差別爆擊을 强行하여 많은 都市民들을 殺傷하며 現代戰의 두려운 殘虐性과 慘禍를 빚어낸 것이 畵面에 옮겨져 있다.
피가소는 現代의 공포와 不安, 不法에 대한 澂한 憤怒속에서 靈長들의 자랑에 대해 「무엇이 관대」하냐고 反問했었다.
그 反問을 통해서 공포와 不安 不法에 머물지 않고 그 反對의 側面 즉 공포에서 崇敬, 不安에서 安靜, 不法에서 正義가 뚫어진 것이다.
良心을 저버린 나라와 인간, 그들의 손아귀에 있는 科學이 낳은 버섯型의 구름기둥, 악마적인 권력욕과 지배욕이 낳은 총알의 화약불 이런 모습을 통해서 런 反問없는 萬物의 靈長의 눈에, 보이는 것이란 오로지 虛無, 虛脫뿐이요, 滅亡뿐이다.
解放 이후 오늘까지 이 사회는 混亂과 錯雜속에 가라앉아 있기만 했고 現在도 그러하다. 이속의 어디에 神佛의 모습이 있느냐고만 萬物의 靈長들은 원만하고 있다. 그러나 神佛이 계시지 않을 수 없다. 6.25 검은구름 기둥아래서 냉전으로 兩斷된 탓에 일어난 가지가지의 비극 속에 말없이 죽은 자들이 썩은 냄새를 풍기는 헐벗고 굶주림 속에서 神佛은 그 모습을 바꿔 萬物의 靈長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이나 부처님은 얼굴을 가리고 모든 靈長으로 부터 버림받은 존재자의 모습으로 계시지 않는가.
가장 높고 위대한 것이 가장 얕고 적은 것을 억누르고 가장 聖스러운것이 가장 俗된것을 짓밟는 것에만 하느님이나 부처님의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것이나 聖스러운것이 그 모습이 바뀌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 그 이만이 萬物의 靈長일것이고 그분만이 종교인일 것이다. 惡은 惡, 善은 善, 不義는 不義로만 보는 인간은 合理論者이요 道想家이나 그것들의 바뀌어져 있는 모습을 찾는 者만이 종교인일 것이다. 피카소가 「케르니카」의 慘禍와 殘虐속에서 變化되어 모습을 바꾼 靈長들의 모습을 찾아낸 것 같다. 종교는 「무엇이 관대」의 反問을 萬物의 靈長들에게 던져준다. 이 反問을 갖고 現我를 넘어선 超我는 나타난다. 이 넘어선 나를 종교는 時時刻刻가르쳐 준다.
넘어선 超我는 그대로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超我는 모습을 바꿔 現我가 된다. 그 때마다 다시 넘어서는 일이 있어야 한다. 이 넘어서는 곳에 종교가 있고 넘어서는 사람이 萬物의 靈長을 넘은 종교인 이다.
종교인은 하느님이 여태까지 인간에게 주지 않은 것을 찾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