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7) 놀람 ③
발행일1969-02-09 [제655호, 4면]
<…전번 서울갓을때에는 참으로 유쾌하고 뜻있는 시간을 보냈읍니다. 현주씨는 날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내 머리속에 그리고 있던 현주씨 이상으로 실제 인물인 현주씨를 보고 기뻐했읍니다. 그동안 현주씨와 글월로 친구가 되어 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뜻있고 이런말이 용서된다면 행복한 일이었음을 그날 차를 타고 내려 오면서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읍니다. 이제부터 서울에 가면 용무만이 아니고 만나볼 사람이 있게 됐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내 인생의 앞길을 밝게 해줍니다. …>
편지는 전에 없이 나긋나긋한 필치로 섬세한 정감을 풍겨주기까지 했다.
(내가 퍽 좋은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지?)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심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아마 극장 「라비」에서 만났던 혜경이의 행복에 겨워있는 모습에서 받은 알지 못할 충격과 본능적인 부러움이 남아 있는 탓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더라도 중년신사는 경계해야 된다는 마음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가셔지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주는 편지를 내려읽었다. 지금가지 오곤했던 편지중에서 처음으로 가장 긴 것이었다.
<…내려와서 곧 편지를 쓰려고 했으나 감기에 걸려 며칠 들어 누었었죠. 독감이던 모양 얼른 회복이 되지 않아 차일피일 이제야 붓을 들게 됐어요…>
(알았다?)
까닭없이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더욱 처량한 생각이 든 것은
<뭐, 집에 있다는 사람이 철없는 아이들인데 식모아이라는건 앓을때 나를 시중해준다기 보다 나를 괴롭히는 존재라고나 할까요. 일일이 앓으면서 내가 지시를 해야 따끈한 국이나마 끓여주는 형편이니… 이건 안써도 될말을 했는가 보군요…>
이런 대목이었다. 이 대목을 읽다가 현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철없는 아이들만 있어? 식모아이는 어쩌고 어쩐다고? 그럼 부인은 없나?)
놀람과 동시에 경계심이 또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옳지. 부인이 없구나. 그래서…) 역시 야심을 가지고 그동안 펜팔을 했구나 하고 현주는 편지를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이상 내편에서 편지를 보낼 것도 없지)
그러나 역시 덮어 놓았던 편지를 집어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 올라갔을때의 사무적인 일이 그땐 미진햇어요. 쉬 다시 올라가게 되겠는데, 그때 만나 볼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가기전에 또 편지할 시간의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때까지 안녕히…>
그러나 또 편지할 시간의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햇으면서도 일주일이 지내고 열흘이 지나도 편지는 없었다. 그동안 현주는 그냥 편지를 받은채 회답을 까먹을까 생각했으나, 그건 오히려 비겁한 일이라고 단정하고 회답을 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문면은 지극히 담담한 필치로써 보냈던 것이다. 그랬는데 보내겠다던 편지도 보내지 않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현주는 박훈의 편지가 기다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 혜경이의 약혼식날이 다가왔다. 미리부터 호들갑스럽게 예고했던 일이지만 이번에는 맞설을 보고난 뒤와는 달라, 약혼식 전날에 둘이 함께 찾아와서 내일 꼭 나와달라고 청했다. 역시 자신들의 행복을 친구에게 자랑하는 심정이랄까? 어떻든 나가기로 약속했다.
그 혜경이의 약혼식날 아침이었다. 오후 한시에 식이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여유있게 열두시쯤 나가려고 하는데
『전보요.』
대문을 부드리는 건 전보배달부였다.
(전보라?)
나가려던 참이라, 대문께로 가서 받아보니 박훈씨가 친 것이다
<오늘, 밤7시반 도착 훈>
(역에 나와달라는 건가?)
처음에는 반가운 것 같기도 하고 뜨끔한 것 같기도 했으나 마음이 가라앉으니 이런 푸념이 제절로 나왔다. 그러나 그런대로 전보를 빽 속에 접어넣고 혜경이의 약혼식장으로 갔다.
남자측도 그러려니와 혜경이측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부형들의 사회적 지위도 상당했으므로 약혼식이라지만 어지간한 결혼식에 모인 사람들 보다 적지않다는 인상이었다.
그런중에서도 혜경이는 현주를 우인 대표로 지정해주는 호의를 식장에서 끝까지 지켜주고 있었다.
양식(洋食)전문 그릴이었으므로 양측의 손님들이 쭉 늘어앉았다.
현주는 혜경이를, 오늘의 주인공들과 그 부모들이 앉은쪽의 좌석의 여자편의 말석을 차지하고 앉았었다.
결혼식처럼 주례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사회겸 식을 주재하는 사람이 있어 예물교환 등의 순서가 거침없이 진행되고 음식을 먹게됐다.
그 그러면서 여흥으로 들어갔다. 남자측의 친구들이 무척 짓궂어 노랜느 그쪽에서 먼저하더니 슬그머니 혜경이편으로 바톤을 넘겨
『우선 신부의 우인 대표로 나오신 분의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여흥의 사회를 맡아보는 청년이 현주에게 시선을 쏘면서 말했다.
그러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참석한 현주였다. 갑자기 당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노래 실력이라고는 통없기 때문이었다. 얼른 일어설 수 없었다. 얼굴이 발개 머리를 수구리고 있으려니 사회가 말을 듣지 않았다.
『옆에 가서 엎드려 절을 해야겠읍니까?』
혜경이
『얘, 하려무나 아무거나.』
오히려 독촉이었다.
할 수 없이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