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報本儀禮(보본의례)와 宗敎信仰(종교신앙)] ② 虛禮(허례)의 眞理(진리)
禮(예)=仁(인)의 정신(示(시))을 물질(豊(풍))로서 표시하는 행위
孝道(효도)➡博愛(박애)의 仁道(인도)➡理想(이상) 世界(세계)
광선이 反射(반사)하듯 인간의 恩義(은의)에 反本(반본)하는 것이 孝道(효도)
부모의 은덕도 갚지 않는 자가 결코 他人(타인)에게 은덕을 베풀리 만무
私的(사적)인 情義(정의)에 근거를 둔 報本儀禮(보본의례)는 公的(공적)인 道義心(도의심)의 根源(근원)
가서 오지 않는 것도 禮(예)가 아니고 와서 가지 않는 것도 禮(예)가 아니다
「禮記」 經解篇에 의하면 『喪祭의 禮는 臣子의 恩義를 밝히는 所以라 喪祭의 禮가 폐지된다면 臣子의 恩義가 각박해서 死者를 배반하고 生者를 무시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다』고 하였으니, 喪祭의 禮는 신하된 자가 君上의 은의에 보답하고 자식된 자가 부모의 은의에 보답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그의 私的인 관계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아가서는 公的인 사회에 유익한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曾子는 『愼終하고 追遠하면 民心이 厚德하게 되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民心을 厚德하게 만드는 방도로서 喪祭의 禮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事死如事生」하고 「事亡如事存」하는 것은 도덕적 정신이 되기 때문이다. 先君이나 先親을 잊어 버리지 않고 추모하는 마음은 결코 장차 무슨 은덕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과거의 많은 은덕을 갚는 것이니 그것이 도덕정신인 것이다.
무릇 死者를 배반하는 것은 인생을 망각하는 것이다. 生者는 영원히 生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死하는 것이요. 死者는 영원히 死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또 生하는 것이니 輪廻하는 生死의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종교적 신앙이라면 生時에 봉양하던 부모를 死後까지 추모하고 死者를 추모하는 정신을 사회에까지 확대해서 그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은 윤리적인 의례인 것이다. 이에 孝의 진리와 仁의 大道는 禮道의 중심점이라, 모든 儀禮의 條目은 오직 仁心의 표현이며 仁心의 点은 효도로만 수행하는 것이다. 仁道는 먼데 있고 효도는 가까이 있으니 가까운 효도를 통해서 먼 仁道로 가게 하는 것이 儀禮의 사명이다. 『登高에는 必自卑하고 行遠에는 必自이라』 가까운 부모의 은덕도 갚지 않는 자가 결코 먼 타인에게 은덕을 베풀리는 만무한 것이므로 먼저 효도로 통하지 않고는 仁道로 갈수가 없는 것이다.
공자는 천하를 平治하는 至德要道로서 「孝經」을 說하였으니 萬人이 共히 효도를 통해서 仁道로만 가면 民用和睦하여 上下無怨한 理想세계가 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을 다 박애하는 仁道는 멀지마는 부모를 尊奉하는 효도로 통하면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儀禮는 효도를 연장한 實行要目이라, 이것이 인간을 도덕화 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무릇 물체의 광선에는 반사가 있고 음성에는 반향이 있으니 인간의 恩義에 反本하는 것이 효도인 것이다. 부모가 자신을 생육한 은의를 反本하는데 평시에는 봉양하고 病勢에는 救療하다가 서거했다고 망각할 수는 없으니 送終하는 喪禮와 추모하는 祭禮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追養繼孝를 하는 報本儀禮는 私的인 情義에 근거한 것이지마는 이것이 실은 인간社會에 奉公하는 公的인 도덕심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효도는 결코 가정윤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推恩하면 足以保四海라』고 맹자는 말하였다.
원래 「儀禮」라는 말은 周公이 지은 書名인데 그 내용은 인간의 사회적인 행동규범을 명칭하게 된 것이다. 字意로보면 儀는 「義人」이니 윤리적으로 의리있는 인간의 태도인 것이며 禮는 「豊示」니 정신적으로 풍성한 示神의 행동을 의미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義字를 분석하면 羊我의 合字이니 전체에 羊順하는 自我의 도리며 豊字를 分解하면 曲豆의 合字이니 木器(豆)에 山처럼 隆崇(曲)하게 담은 형용이다. 그러니 儀禮라는 것은 전체적인 公義에 맞 인간적인 태도로서는 풍성한 정신을 표시하는 公共的인 행동규범인 것이다. 그러나 禮儀라고하면 그것은 禮의儀라 개인적인 도덕행위의 태도라고 할 수 있으니 두字를 上下로 바꾸는데서 公私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禮儀는 개인이 禮대로 행동하는 儀이고 儀禮는 公衆의 儀를 규정한 禮이니 이 兩者는 서로 因果의 관계를 가지고 不即不離한 것이다.
요컨데 禮는 仁의 정신(示)을 물질(豊)로서 표시하는 행위라, 示는 神性이고 豊은 物性이니 神物이 合一된데에 禮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神性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자기에 있는 內在的인 心情과 사회에 있는 外在的인 정신이며, 物性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자기로서 행동하는 육체와 外界에서 사용하는 物財인 것이다. 그러니 禮는 仁의 정신으로서 육체로 행동하고 物財를 사용하여 사회의 정신으로 통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심정에서 출발하여 육체적 행동, 外在的 物財, 그리고 사회적 정신으로 통해서 자기의 심정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禮記」 曲禮篇에는 『禮는 노상 往來하는 것이라, 가서 오지 않는 것도 禮가 아니고 와서 가지 않는 것도 禮가 아니다. 인간은 禮가 있으면 안전하고 禮가 없으면 위태하므로 禮란 것은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으니 禮가 往來하는데서 인간의 사회는 안전하게 결속이 되는 것이다.
이에서 禮의 仁에 대한 관계를 圓形으로 말하면 仁은 中点인데 禮는 圓周인 것이며, 또 식물로 말하면 仁은 根幹인데 禮는 枝葉이라 유일한 仁心에서 數多한 禮規가 나오는 것이다. 仁은 마음의 자세요, 禮는 육체의 행동이니 마음에 없는 행동, 仁없는 禮만은 중심없는 원주처럼 공허한 것이고 근간없는 지엽처럼 枯死하는 것이다. 仁心은 유일하나 禮條는 萬殊하니 儀禮3백과 威儀3천은 오직 仁心으로 일관하는데만 內實한 생명이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인간으로서 仁이 없다면 禮에서 어찌하나』고 하였으니 禮는 仁의 표현이지마는 또한 禮行으로서 仁心을 기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儀禮란 것이 필요하니 聖人은 體制로써 인간을 仁化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一動一靜을 규정한 體制대로만 실행하면 仁化되기 때문에 공자는 『克己해서 復禮함이 仁이 된다』고 하였으니 禮道를 통해서 仁道로 가는데에 報本儀禮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禮記」 禮運篇에는 『무릇 禮는 先王이 天道를 받아서 人情을 다스린 것이라 禮穢를 잃는 자는 죽는 것이고 禮를 얻는 자는 사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禮란것은 우주자연의 존재법칙에 의방해서 인간사회의 當爲原則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오직 이성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고 조금도 권력이 개입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重農主義 경제학자 F·QUESNAY는 이것을 萬古不易의 자연법이라고 극구 칭찬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에 儀禮를 현대화하는데는 오직 이 자연법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유일하나 자유의 의지는 萬殊한 것이니 萬殊한 의지를 유일한 법칙에로 歸一시키는 것이 制禮의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報本儀禮의 要目과 理論」에서 5개의 원칙을 세웠으니 ①追慕上의 원칙 ②위생상의 원칙 ③敎化上의 원칙 ④전통상의 원칙 ⑤경제상의 원칙에 의해서 儀禮의 현대화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계속)
柳正基(忠南大學院 교수·東洋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