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하느님께 榮光을 올리기 위하여 산다는 表現이 있다. 그리고 그 表現은 처음으로 기독교 信條를 배운 사람들에게는 매우 奇異하고 알아듣기 힘든 주文처럼 들릴 수가 있다.
공손한 성품의 사람이면 무조건 그러느냐고 받아들이고 더 생각치 않기로 각오할 것이고 다소 불손한 독창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픽웃어버리곤 상대도 안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람이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교리와 더불어 퍽 구태의연한 表現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영혼은 육신이 죽어도 불멸이라는 교리가 육신을 죄악시하고 영혼만을 단순히 신성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때 기독교의 사상체계 현실을 경시 또는 멸시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그것이 시정되어야한다는 것이 제2차 「바티깐」 공의회 이후 움직임인 줄로 안다.
나는 사람이 하느님께 榮光을 올리기 위해 산다는 말을 좀 바꾸어 생각해 보라고 주장하고 싶다. 내가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대승불교의 정신에 입각해서 생각해 본 것이다.
살고 있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또 삶이란 현상은 그 모든 살고 있는 것에 공통한 본능적 욕구충족의 움직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배고플 때 먹고 잠이오면 자고 해가 돋으면 일어나는 그것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냐? 그런 삶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것만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동물적 삶의 習性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보다 더 高次元的인 삶의 樣式과 內容을 창조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이 주어져 있다.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意識의 발달이다. 그리고 그 의식의 발달에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그 사람들 사이에는 같은 사람이면서도 삶의 차이를 나타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의식의 발달, 그 발달의 차이라고 하지만 의식이 平面的이며 모두 同質的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의식구조는 階層的이며 인간의식의 발달상은 그 方向과 深度에 있어서 상이하다.
그 의식의 진정한 발달 與否를 판단하는 尺度는 지식의 分量이거나 利己主義的 賢明度에 있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반드시 天國이나 極樂에 갈 第1候補者는 아니다. 세상에서 남을 누르고 富者가 되여 出世를 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약삭빠르고 심술궂고 악착같으며 대담하다고해서 그가 하느님이나 부처님께 영광을 올릴 수 있는 후보자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살고 있다고 하면서 사실은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대승기신론 같은 佛典에서는 사람이 殺生을 용했거나 도둑질을 했거나 간음을 했거나 거짓말을 했거나할 때 그 사람은 그의 生命인 마음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선언한다. 殺生하는 인간은 이미 산인간이 아니다. 살아 있는 듯한 죽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래 아직도 그가 움직인다는 것은 회개의 가능성을 表示하는 것이다. 이 殺生한 인간, 스스로 그 양심을 죽인인간이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회개뿐이다. 참회뿐이다. 불교는 마음으로 욕심과 시기·질투·분노를 품은 인간을 썩은 인간으로 규정하고 있다. 냄새가 나는 인간으로 규정하고 있다. 냄새가 나는 인간으로 말이다. 우리는 모두다 다소간 이 썩은 인간의 부류가 아닐까? 구정물이 나고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기에 그것을 감추려고 화장을 일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렇게 사는 것도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가? 부처님께 영광이 되는가? 같은 佛典은 또 말하기를 사람이 아직도 마음속에서 「나」개인이라는 의식을 남겨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온전히 삶을 회복하지 못할 存在라고 못 박는다. 「나」와 「너」의 의식이 아무리 좋은 의도아래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 대립의식이 있는 한, 그는 同體大悲 - 一心同體의 「사랑」을 具現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인간이면서 그 마지막 自我意識까지를 씻어버리고 同體大悲의 마음을 들어내기에는 어렵게 생겨먹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서글픈 인간으로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同體大悲의 의식이 우리마음의 最深層에 간직되어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환히 들어낼 수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산히 흩어진 이 개개의 대립적 「나」들이 사랑으로 융화하는 「하나」의 마음을 들어 내기위해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李기영(東大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