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가톨릭대학신학생들이 주최한 죄담회에서 「현대의 사제像」이라는 주제가 진지하게 토론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초청된 인사들을 볼 것 같으면 모 협의회 회장, 모 클럽회장, 모 여성 단체회장 등등… 열석한 인사들은 얼핏들어 평신자들을 대표한 듯싶다.
좌담회에 직접 참관치 못한 주제에 다만 가톨릭시보에 초기한 기사만을 보고 또 그것이 현대의 사제像을 다룬 내용의 일부로 간주하고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을 말한다.
현대 사회는 민주화하고 있고 철저하게 민주화 되어가는 사회를 낙원시하고 있다. 교회도 시대에 따라 부지런히 현대화 하지 않고는 이 사회에 참여한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
그런데 교회는 아직도 군주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권위주의적, 독선주의적, 고식적이라고 비판의 소리가 높다.
거기서 집무하는 사제들이 오만불손하다는 말이 서슴없이 나왔다. 그래서 전교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한다. 선교자는, 교양이 없는 몇몇 선교자 때문에 전교방해가 된다는데 대해서 참말 일대 각성을 해야 하리라. 이제는 사제들이 규탄을 받는 시대가 온 것이라 생각된다.
그 높은 자리에서 신격화되던 사제像이 무너지고 있다. 마땅히 그런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 신자들은 그만큼 계몽되고 과감해졌다.
권위는 봉사 받기를 생리적으로 원하고 때로는 강요하기도 한다. 옛날 외국서 온 선교사들이 한국신자들 위에 군림하여 상놈 대하듯 우월감을 가졌다. 시골 공소에 가보라. 신학교에서 갖나온 새파란 신부 앞일지라도 연만한 노인들은 맞담배질을 아니 한다. 젊디젊은 신부가 손자벌 되지만 「이죄인 몸이…」 어쩌고 저쩌고 한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느님의 백성만큼 순진한 무리도 없다고 누가 말했다. 신부도 뼈있는 양반가문에서 나와야겠다한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현대에 살고있는 신부는 어떻게 보면 신자들이 희구하는 그런 현대의 사제像이 아닐는지 모른다.
봉사하기 위해 투신한 자들이 봉사받으러 왔다면 우리는 자체 비판을 가함이 마땅할 것이다. 무언가 지금은 몸부림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고 있다. 교회는 군주제도이다. 엄한 상하의 구별이 있다. 순명이라는 굴레도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우리에게 질서정연한 계통과 군주체제의 조직을 바탕으로 발전하여온 역사를 지녔다.
아무리 현대화 물결속에 휘말리고 있다해도 발판을 흔들어 놓을 수는 없다. 교회 최고지도자인 교황을 민주주의식으로 선거를 하더라도 신부를 신자들이 선거해서 임명치는 않는다. 사제직은 본질적으로 고귀한 것이다. 나라의 제왕도 여기엔 무릎을 꿇어야 한다. 마치 신자인 아버지가 아들인 신부에게 꿇어 죄를 고백하듯이. 다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면 이 직위를 맡은 자의 인격과 교양의 차이에서 평가도는 달라질 것이다. 아마 이러기 때문에 소수의 실격 신부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을가 한다. 언행이 불순하고 고자세를 취하는 신부들은 반성을 할 줄 안다. 그렇다고 신품받기전에 신자들에게 구두시험을 받을 필요는 없으리라. 그렇다고 오늘에 사는 사제들의 像을 보고 실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훨씬 겸손하고 훌륭한 성인신부들도 있다. 그 사람은 그 사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 사제는 그 사람도 아니다. 사제는 사제이지 동격을 배제한다. 그런데 요즘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대개 한가지 관사가 덧붙여 부르는 것이 있다. 성유로 축성된 「사제」이면 그것이 전치사요 후치사다. 신부 이름위에 박사의 존칭이 얹혀있음은 사제칭호에 어떤 목욕감을 느낀다. 신학박사 ○○신부, 철학박사 ○○신부 같은 것이다. 박사가 설교하는 시대가 왔는가? 군중은 암시적으로 신부 보다 「박사」님에게 「어필」한다. 어떤 고명한 목사님은 「버스」안에서 만나 『K목사님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했을 때 『이사람! 이런 때는 목사가 아니라 K박사라고 불러!』하더라고 한다. 만일 성당에서 사제가 강론하지 않고 박사가 설교한다면 신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도 그 앞에 잘 보이기 위하여 아양을 떨 것인가?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하나의 혁명이요, 개혁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특권적 사제와 서민적 평신자의 관계가 그 본 자세를 찾고, 시대적응을 외치고 있다. 신자들의 위치가 과거 어느 시대보다 두드러져 있다. 교회의 사회참여 못지않게 평신자가 사도직에 참여 하고 있다. 이번의 좌담회가 「현대의 사제像」을 내걸고 비판을 했으니 이왕이면 「현대의 평신자 像」도 다루어 비교함이 어떨가? 지난 17일자 가톨릭시보는 하나의 문제를 제시한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화의 전개를 시도한 걸로 간주하고 또한 좋은 충고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렇다 하고 그 누구를 겨누어 결점을 지적한듯한데 일반적으로 신부전체의 결점인양 비판을 넘어서는 공개 비난이 되지 않았는가?
묻고 싶다. 과연 신자들은 정당한 명령에 순종하는 척 하지만 이중 성격자로 전락하고 있는가? 「파리서이」의 소굴에 사는 기분이 일시에 든다.
묻고 싶다. 과연 교회 조직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 일반이 알지만 사실은 모래알 같은가? 허세만 부리고 모래 위에 쌓이고 있는 가톨릭이로다. 망령이 난무하는 폐가로다.
나는 말하고 싶다. 교회는 주교나 신부의 소유물이 아니다. 주교가 너머지고 신부가 너머져도 그 자리에 교회는 재건된다는 사실을.
좀 더 대화를 순화시키기 위하여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말을 삼가할 수는 없겠는가?
鄭淳在 神父(대구 수성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