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話(대화)를 위한 「시리즈」] 慈悲(자비)에 관하여 ⑤
「나」만을 주장할 아무런 理由(이유) 없어
佛道(불도)는 一致(일치)의 道(도)
나 · 너 그것은 一切即一(일절즉일)
歸依佛(귀의불)은 衆生(중생)의 理想(이상)
佛陀(불타)는 智慧(지혜) 慈悲(자비) 겸비
완전한 지례없이 완전한 慈悲(자비) 없어
지혜의 完成(완성)은 主客對立(주객대립) 벗어날때
발행일1969-02-16 [제656호, 2면]
앞서도 말한바와 같이 불타의 本領은 지혜와 慈悲에 있다. 불타의 本領이란 表現은 불교의고유한 술어 「佛生」을 필자가 임의로 옮긴 표현이다. 「산스크릿트」 原語로는 BUDDHATA이지만 이 말을 그대로 번역하여 서양학자들은 BUDDHAITY, BUDDHAITE 등으로도 옮겼다. 覺者 즉 불타의 覺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빼놓으면 覺者일 수 없는 그 核心이 바로 지혜와 慈悲란 말이다. 그러나 이 지혜와 慈悲는 槪念이 아니라 살아있는 예지며 聖德인 것이다. 이 두가지는 사실 하나의 完全無缺 圓滿無애한 人間性의 두가지 面일뿐, 다른 두개의 實體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보여진 角度가 다를 뿐인 것이다. 지혜는 認識의 面을 말하고 있고, 慈悲는 實踐의 面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서 妥當할 것이다.
모든 經論들은 온전히 지혜롭지 못하면서 온전히 慈悲로울 수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 거꾸로 온전히 慈悲돕지 못한 爲人이 온전히 지혜로울 수도 없음을 斷言하고 있다. 一例로 究竟一乘寶性論 이란 佛典의 佛寶에 관한 풀이를 들어보면 그 사정을 대강 알게될 것이다.
佛體 즉 覺者의 本體에는 時間的 空間的 限界가 없다고 선언한다. (佛體無前際 及無中間際 亦復武後際) 그 本體란 우리의 아무리 巧妙한 分別力으로도 파악되어지지 않는 超世間的인 것이기 때문에 이 「體」란 말조차도 쓸 수가 없는 不可說, 不可觸, 不可思議한 것이다. 우리 罪많은 凡夫의 하잘것 없는 表現의 世界를 넘어서 있다는 뜻에서 그 體를 「적靜」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적정이란 虛無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佛典의 詩句에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씌여있다.
『적靜自覺知 旣自覺知巳爲欲令他知 是故爲彼說, 無의 常恒道』
佛體는 적정한 것이지만 그것은 虛無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妄想分別心이 끊겨있지만 지혜로워진 분이시다.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아신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人生과 宇宙의 모든 事象의 의미를 아시고 난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또한 그 뜻을 알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無의 常恒道를 가르치시는 존재라는 것이다.
無의 常恒道란 平和의 길 영원한 길 영원한 平和의 길을 깨닫고 그것을 누리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그에게는 지혜와 慈悲의 칼과 신비스런 金剛의 망치가 있다는 것이다.
『佛能執持彼 지혜慈悲刀及妙金剛저 割절제苦芽최破제見山 覆___意 及一切조林 故我令敬禮』
佛은 능히 그 지혜와 慈悲의 칼과 신비스런 金剛의 망치를 가지고 온갖 苦惱의 싻을 잘라버리고 山더미같은 온갖 잘못된 주의 주장을 파헤치고 전도된 가치관을 뒤엎어서 그러한 그릇된 생각으로 꽉찬 번뇌의 숲을 개척해 간다는 것이다.
佛敎를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지혜와 慈悲의 成就者의 뒤를 쫓아 그의 영원한 平和의 길을 배우고 익혀 앞서 가는 사람과 뒤따르는 사람이 서로 도우며 각자 자기자신의 完成을 통해 모든 이웃과의 一心同體를 이룩하기로 기약하고 생활하는 것이다. 歸依佛兩足尊, 歸依法離欲尊, 歸依僧衆生中尊 이 세가지 귀절로 表現되는 이른바 三歸依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兩足尊 - 지혜와 慈悲보다 具足하신 어른이란 말이다. 그 佛께 歸依하나이다. 慈悲없는 생활을 가르치신 그 尊貴한 法에 歸依하나이다. 사람들의 集合體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그의 弟子들, 求道者들의 존귀한 共同生活에 歸依하나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불교도의 理想이다. 필자는 이 佛敎徒의 念願中의 지혜의 完成이란 이상이, 西洋人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부족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다. 지혜의 完成 없이는 慈悲의 完成이 없다고 한다면 그 지혜의 完成이란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지혜의 完成이란 主 · 客 對立의 分別心을 우리의 意識 속에서 除去하는 것을 最高의 目標로 한다. 즉 그때에 無綠의 慈悲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無綠의 慈悲야말로 慈悲中의 최고의 자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前回에 이야기 한바 있다. 그러나 그 가장 높은 단계의 意識革命까지는 이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한계단, 한계단 보다 완전한 지혜의 길을 달려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가 적어도 分裂과 對立이라는 敵對的 관계에서 점차 一致의 길로 가야한다는 말이다. 그 마지막 一致의 경지를 우리는 一心同體라고 부를 수가 있다. 혹은 그러한 경지를 一即一切, 一切即一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一即一切를 普遍性 속의 多樣性이라고 한다면 一切即一을 多樣性 속의 普遍性이라고라도 할까. 단순한 사실적 서술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체험적으로 그렇게 깨달아진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흔히 「나」다 「너」다 부르는 그 一切의 事象이 실은 아무런 不變性 항구성도 없는 것이며, 또한 實體性이 없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 세상에는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색다른 個性的인 事物이 있으나 그 個體性이란 하나의 因果關係 속에 묶인 그것도 항상 변화무상한 다양한 인과관계의 복합체에 不過하다. 그리고 그 因果關係로 끊임없이 生成消滅하고 있는 그 流動相은 어느 하나도 마음, 생각, 意識의 所致가 아닌 것이 없다.
오직 하나인 마음, 그 깨끗한 마음의 바다에 無明의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게 된 것이라고 비유할 수가 있다. 그것을 元曉大師같은 이는 수起六道之浪이나 不出一心之海라고 하고, 그러므로 우리는 널리 그 가지가지의 衆生들을 濟度하려는 願을 발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濟度란 고통의 바다속에 있는 뭇 生命있는 자들을 건져 저쪽 安樂한 언덕으로 넘겨 준다는 말이다. 또 그 가지가지의 個別的인 衆生相이 一心밖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능히 同體되는 大悲를 일으킬 수가 있다고도 하고 있다.
元曉大師는 또 『하나인 마음 이외에 다시 무슨 다른 實在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리석어서, 그 하나인 마음을 잘 모르고 방황하는 까닭에 그 오교해야 할 바다에 파랑이 일고 起伏이 생기며 갖가지 平和롭지 못한 인간의 限界狀況은 생겨나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