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노 과르디니 神學者·思想家(신학자·사상가)의 生涯(생애)
公議會(공의회) 기초 닦은 섭리적 人物(인물)
「나치」로부터 추방당하고 「그리스도 傳記(전기)」 집필
典禮(전례)운동의 原理(원리)된 청소년 지도
昨年에 作故한 익숙한 이름들 가운데 우리는 로마노 과르디니에 오래 생각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第2차 「바티깐」 公議會의 本作業이 一段落된 이때 天主는 이 巨大한 課業의 先驅者를 永遠한 休息에로 召喚하였다.
그를 우리는 先驅者라고 불렀지만 그는 實로 不識中이 公議會의 꽃피 피게까지 밑거름이 된 基礎作業을 한 攝理的인 出家한 일꾼이었다.
그렇다고 그는 앙리 더 뒤박이나 때이야르 더 샤르댕 같이 世界通信의 表面에서 妄却된 그늘에 있었지만 公議會의 敎父들의 입술에 가장 빈번히 오르내렸던 이름은 과르디니 그였다고 한다.
昨年 10월 2일 83歲를 一期로 죽은 과르디니는 世紀初의 反「모데르니즘」과 充足主義의 敎會를 公議會의 敎會에까지 고요히 變貌시킨 偉大한 事業을 이룩하는데 큰소리도 아니고 남의 破門을 斷定짓는 言語도 쓰지 않았다. 정녕 그는 言語에도 自制를 加할 줄 알았던 사람이다. 현대의종교적 생활형성에 있어서 과르디니는 신학자뿐만 아니라 소박한 사람들에게도 지도자였다. 그의 저서는 대부분 종교사상과 수덕신심의 책들이지만 곰팡이 냄새나는 다밥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본다면 그의 저술의 「테마」만큼 다양한 것이다. 이태리 「베로나」에서 출생하여 독일 「마인쯔」에서 성장하여 1910년 사제의 품에 올랐다.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그 직후 「튜빙겐」에서 였다. 그후 그는 「라인」강변의 대도시에서 사목에 종사하면서 청소년 지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8년 「전례의 정신」이라는 소책자를 내었는데 이것이 그후 「킥크보른」 청소년 운동을 중심으로 하여 유럽 전역에 전파되어간 전례운동의 원리였다.
전례운동과 더불어 공의회의 정신적 기반을 형성하고 길을 닦은 또하나의 학자로서 지도자로서 교수로서의 그의 업적은 세계에의 개방, 「실제」와의 대화였다. 이러한 실제와 세계에 대한 개방은 유아독존적 단정이 아니고 실제와의 대화의 정신이 공의회의 사목헌장에 있어서 공식화 되었다.
또 당시 이방지대와 같은 「베를린」대학에서 저 유명한 가톨릭세계관에 대한 강의가 그 계기가 되었다. 아우구스틴 · 단테 · 몽탠 · 빠스깔 · 키에르케고르의 강의 및 토스토에프스키 · 니이체 · 휠델린 · 릴케 · 쉑스피어의 「세미나」의 그의 강좌는 학생들로써 항상 만원이었다고 한다. 필자의 대학시절 그의 「자기교육에 관한 편지」는 인기였다고 기억에 새롭다.
1939년 「나치스」는 그를 부적격으로 낙인을 찍고 교수직에서 추방했다. 강제퇴직을 당한 10년동안 그는 저 감명깊은 「主=그리스도의 전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신학적 자기 형성에 있어서의 시발점이 된 집념이 즉 그리스도 탐구 - 교회의 신비가 여기에 성문화 된 것이다.
이제 천주의 계획에 있어서의 그의 사명은 끝났다. 그리고 시대는 바뀌었다. 그의 만년에 집필한 소책자의 제목 「근세의 종말」이 상징적으로 말해주듯이….
金泰寬(西江大敎授 · 哲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