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藝時評(문예시평)] 生命(생명)의 原力(원력)이 없는 文學(문학)
詩(시)「미스아니(安(안))지」…李相和(리상화), 短篇(단편)「한여름의 권태」…宋炳洙(송병수)
감각적인「카타르시즘」이룩해도 일부독자층의 악영향
作家(작가) 이미지, 凡俗(범속)한 感情(감정)관 달라야
요즈음 발표되는 문예작품들 속엔 기이한 작품들이 많다. 지난 10월호 「現代文學」에서만 보아도 시에서 李相和의 「미스 아니(安)지」와 소설에서 安炳洙의 「한여름의 권태」가 있다.
먼저 시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 電話 「다이알」 소리. 이윽고 N 次長 『미스 아니지, 난데에』 미스安 어젯 저녁일로 얼굴이 붉어지며 망설이다 『네…』-
짜장면 한 그릇짜리와
연못을 파면 얼마나
파것나. 파봐야
이튿날이면 눈알만
되게 튀어나올 것을-.
◁中略▷
덤벼들어 끝까지
후벼 내고서야 자빠지는
당신은, 틀림없이
미스 아니지, 그렇지.
이시에 대해서 한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조잡한 물질주의와 야비한 속물근성에 대한 항의다. 이와 같은 抵抗은 韓國詩의 발전적 美學을 위하여 바람직한 것이다』(現代文學 1월호·朴喆熙)
다음은 소설 「한여름의 권태」에서 몇줄만 들어 보겠다.
-「선글라스」에 은폐된 얼뱅이의 눈은 염치좋게도 아까부터 예의굴곡진 부분을 더듬고 있었다.
『이걸 탐하고 있지』
마침내 얼벵이는 털북송이의 다리를 뻗어 예의 그 부분에 발가락을 정통으로 들이댔다.
『어머』
「미세스」조는 신음 비슷한 기성을 토하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의의 침입에 대한 반사적인 방어동작이기보다 오히려 그러기를 바라던 바의 진전을 위한 준비동작에 지나지 않았다. 『발가락이 먼저라니…, 너무나 무례하군요. 안 그래요?』
그러면서 그녀는 양탄자가 깔린 선실 바닥에 벌렁 누웠다. 역시 「선글라스」에 가려 있는 그녀의 눈이 뭣을 부르고 있는지는 보나 마나 뻔했다. <됐어 여자는 이래야지…>
얼뱅이는 쾌재의 미소를 머금으면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 소설에 대해서도 평론가의 평이 내려져 있다. 『文明批評의 方法은 原始狀態 즉 文明以前의 自然狀態의 도취를 통해 文明에의 脫出을 그리고 있다. 배경은 작열하는 原始의 내용이 풍기는 바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의 행동은 現世의 기존 기성의 온갖 인습과 「모랄」에서 무릇 규제에서의 해방을 염원하는 벌거숭이 인간의 적나라한 원시적 모습이다.』(現代文學 11월호·李유식)
앞에 그려진 소설의 장면은 얼뱅이와 「미세스」조가 바닷가에서 우연히 처음 만난 남녀로서 전개하는 행동이다.
문학은 종교나 사상보다 결코 높은 차원의 것은 못되지만 그 선동력은 가장 강하다. 그것은 종교가 영혼의 문제이고 사상이 머리의 문제라면 문학은 가슴의 문제 감정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와 시인의 문학적 감정, 즉 「이미지」라는 것은 日常의 凡俗 인간감정과는 달라야하는 것이다. 현대의 문학이 그 방법에 있어서 直線의 逆說로서 「쇼킹」한 감정효과를 노리고 거기에서 추악한 현실에 대한 超克의 「카타르시즘」을 이룩할 수도 있다고 하자. 하지만 그 때에는 그 작품이 지니는 理想으로서의 主題意識이 분명히 內在해야하는 것이며 그 주제의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 거치른 방법은 사고능력이 단순한 독자층에게는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본 시와 소성의 경우는 납득을 줄만한 주제의식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딴에는 그 시와 소설이 저항과 문명비평의 의도를 지녔다고도 하지만 그 저항과 문명비평은 근거가 막연할 뿐 일상의 속된 감각적 作戱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는 인간을 높이는- 사랑을 높이는 예술적 창조의 기쁨을 얻을 수가 없다.
이러한 작품을 쓴 시인이나 작가의 결합을 단적으로 지적하자면 그들은 永遠과 우주가 때 묻을 수 없는 생명으로 차있다는 것, 그 생명 本源의 세계에는 사랑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 아뀌나스의 그 우주에 넘치는 기쁨의 신념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은 벽이 없이 우주에 통하는 큰 사랑의 사업을 뜻한다. 자연의 본질은 때 묻지 않는다는 것 교회이전의 인간들 그리고 오늘날 교회 밖의 인간들에게서도 진실과 선의는 하느님이 한가지로 기뻐하시는 바이라는 것을 삐오 12세도 천명한바 있다.
이 사랑과 믿음에 찬 우주 속에서 인간은 한점 먼지와 같은 미물이며, 동시에 그 미물은 또한 우주까지도 느낄 수 있다는 커다란 은혜에 감사하며 창조적인 목표를 보는 예술작업에 힘쓰지 않는 한 우리에게 영원히 살아남을 보람의 문학은 없을 것이다.
부족하고 험 많은 인간을, 또 작가를 교회의 계율로써만 따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문학예술이 內密히 간직해야할 생명의 原動力에 대하여 종교는 忠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具仲書(文學評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