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宗敎觀(종교관)] ㉔ 「거룩」해지려는 순수한 노력
人生(인생)을 심각히 사느냐 안사느냐의 문제
발행일1969-02-16 [제656호, 4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때 느끼게 되는 것은 내가 그 특정한 이야기의 主題를 말할 權利가 얼마나 적은가 하는 점이다. 종종 그것은 그 主題가 人間의 曰可曰否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지금 내가 부탁받은 主題가 그러하듯이)
또 어떤 경우에는 내가 너무도 무식하고 또 너무도 분주하게 살고 있는 연고로 충분한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글을 혹 읽는 사람이 있다면 곧 발견할 일이지만 신앙의 문제는 위에 말한 두가지의 경우에 다 해당이 되는상 싶다.
나는 믿음이라는 것은 대체로 입으로 말하여지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혹 꼭 이야기 되어야 해서 이야기가 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야이기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영감에 의한 어떤 交流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흔히들 하는 믿음에 대한 각 단위의 토론 - 즉 『어째서 성경의 이곳에서는 말세에 대해서 이런 언급을 했는데 저기에서는 저런 말이 되어져 있는가. 이렇데 비논리적인 敎를 믿을 수 없다. 나는 무신론자다.』라든가 『어째서 중들이 고기를 먹느냐 불교고 뭐고 소용없더라』하는 따위의 유치하고 값싼 말들로부터 좀더 심각한 가령 『어떤 사람은 일생을 그렇게 고운 일만 하고 살았어도 복을 못받더라. 그러니 어떻게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느냐. 나는 모든게 허무하더라』하든가, 또는 사람의 목숨이 파리의 목숨처럼 하찮음을 목격하고 실감한 이의 동정에 값하고도 남음이 있는(우리 자신 얼마나 여러번 느껴야 하는 느낌인가!) 하소연에 이르기까지, 이런 모든 議論은 原則에 있어서 무시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신앙에 있어서도 거리를 둔 추리, 논리, 합리화, 이런 것이 다 무의미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충동에 의한 이해라고 할까 깨달음이라고 할까 무한한 위로라고 할까 이런 것들이 신앙하고는 더 가깝고 친한 상태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충동이라는 말보다는 靈感이라는 말이 더 타당한 말일 것이다.
만약 신앙에 이론과 논리와 합리화와 분석과 논박과 이런 모든 것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이차적인 것일 것이다. 즉 『이렇게 해서 이점이 증명되었으니까 나는 신을 믿기로 했다』가 아니라 『내가 사는 것은 믿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나는 살아있지 않다』라는 전제를 확실한 것으로 해 놓은 후 가장 명석한 두뇌와 논리를 가지고 기독교의, 불교의, 유교의, 회교의 또는 그의 수많은 인생을 심각하게 살은데서 나온 여러가지 교의 문제들을 생각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인생을 심각하지 않게 사느냐에 있는 것 같다.
어떤 시인이 『거룩하지 않은자여! 물러가라』라는 말을 외친 것이 있다.
그 말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도야지 고기를 먹은 자라는 얘기가 아니라(교회에 예배보러 가고 도야지 고기를 안먹고 하는 것이 무의미하거나 바보스럽다는 이야기로 생각된다면 상당히 낭패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생각지를 않으니까) 인생을 심각하지 않게 살고 인간을 존엄하게 여길줄 모른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 체면이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敎」를 믿는 사람 좀더 나아가서는 오른손이 하는(좋은) 일을 왼손이 알게 하는 사람 이들은 모두 『거룩하지 않은 자들』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 됐던 거룩한 마음에서 혹은 무아의지경에서 행하여지는 행위, 그렇게 할 수 있고자 하는 순수한 노력, 이런 것이 거룩한 일이고 믿음의 태도가 아닐까.
믿음에 있어서 또 중요한 것은 한눈을 팔지않는 일인 것 같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오다가 잠깐 뒤돌아보는 사이에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아낙네를 나는 자주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조금만 한눈을 팔면 금방 내 몸은 소금기둥 같이 죽어버리고 『겨울나무에 매달린 한잎 잎사귀 같던』(이건 어떤 한국시인의 말이다) 내 믿음이 그만 불리어가고 맡기 때문이다. 이 소금기둥의 예가 적절하게 이용되지 않은 것을 말하는 대신에 다만 내 말을, 거룩하려 하지만 거룩하지 못한, 그러나 거룩한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를 알기 시작한 한 인간이 비교적 순수한 동기에서의 말로만 들어주는 독자가 있기를 바란다.
떨어질듯 하면서 붙어있는 겨울 잎사귀처럼 우리의 믿음은 귀하고 아깝고 조심스러운 것이며 또 겨울 잎사귀에 비길 수 없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또 믿음은, 왜 안되는지를 캐지 않고 그냥 뒤를 돌아다 보지 않는 맹목적이고 미련한 복종, 불합리에 대한 수긍, 이런 것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