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유해와 移葬記(이장기)] 103位(위) 중 21位(위) 유해만 保存(보존)
명동성당 유해 확인 후 가톨릭醫大(의대)에 移迭封鎖(이질봉쇄)
聖石에 쓸 손톱과 머리털 따로 봉안
절두산에 16位(위) 나머진 성당 神學校(신학교)에
우리나라 순교자 중 시복된 분은 79위와 24위 즉 모두 103위다. 그러나 이들 중 유해가 보존된 분은 겨우 21위. 79위 중 보존된 분은 9위, 병인순교 복자는 12위이다.
유해가 보존된 분 중 16위가 현재 서울절두산본당 지하실 墓所에 안치돼있고 79위 중 다섯 분의 유해(▲범 주교 ▲김대건 ▲김안당 ▲모방 ▲샤스땅 신부)는 무덤없이 전국의 중요 성당이나 신학교 등의 제대 성석에 나눠 모시고 있다. 물론 이들의 유해 일부가 모두 교황청에 모셔졌다. 그리고 앞으로 만들 聖石(미사때 제대에 모시는 성인이나 복자의 유해가 든 돌, 이 성석없이는 미사를 지내지 못함)에 모시고자 병인순교복자의 손톱이나 머리털과 유해일부는 따로 절두산성당에 봉안돼 있다. 절두산에 모신 16위는 병인순교복자 12위와 79위 복자 중 ▲최프란치스꼬(한국인 제2사제 최토마스 신부의 부친)와 서울 근교 彦九碑묘소서 지난 4월 30일 이장한 ▲허막달레나와 그의 두딸 ▲이막달레나 ▲이발바라이다. 그러면 병인순교복자 중 유해가 있는 12위의 명단과 이장 이야기를 최석우·장익 두 신부에게 들어본다. 지난 6월 17일 「로마」 교황청으로 유해일부를 각각 보낸 병인복자는 ▲장시메온 주교 ▲안안또니오 주교 ▲서루도비꼬 신부 ▲김헨리 신부 ▲오베드로 신부 ▲민마르띠노 신부 ▲남종삼 ▲최베드로 ▲우알렉시오 ▲장낙소 ▲이명서 ▲손선지이다. 이상 12위 중 이명서와 손선지 복자 외 10위는 모두 서울명동대성당 지하실 무덤에 모셔져 있었는데 교황청으로부터 3월 8일 유해를 확인하고 이장작업명령을 받은 윤공희 주교와 유영 도·최석우·장익 신부는 4월 26일 상오 10시 30분 명동 지하실무덤을 파고 복자 10위의 유해를 확인했다. 이 무덤은 6·25때 공산군이 일부파괴, 納骨돼있은 鉛棺도 헐어 유해가 일부 상해있었다. 그리하여 移葬官들은 유해를 확인한 다음 서울 경운동소재 가톨릭大의학부 해부학실에 이송·봉쇄 보존했다. 유영도 신부 등 일행은 5월 9일 전주로 출장, 전북完州군 飛鳳面 內月里묘소서 복자 손선지의 유해를 10시에 발굴했다.
전주교구의 한공렬 주교와 서알렉시오 등 6명의 성직자들이 참관한 가운데 복자 손베드로의 유해를 발굴, 고산본당 천호공소에 안치 점심 식사 후 전주주교좌성당에 안치했다. 이 자리에는 손베드로 복자의 4대손 필립보씨와 삐오씨도 참석 손선지의 유해는 1939년 8월 24일 그의 순교지 전주숲정이서 전기장소로 이장(升치천주교회)됐었다. 그런데 內月里묘소 옆에는 같은 병인년 8월 여山서 순교한 金成化(야고버) 외 6위의 무덤도 있다.
복자 이명서의 유해는 전북 鎭安郡 鎭安面 모시골에서 발굴 이장했다. 이 유해는 모시골에 모시기전에 진안군 소양면 유상리 후룩막고지에 묻혀있었다. 이장식에는 유족 김성순(마리아 71세·복자의 3대독자인 손부) 장순영(말다 58세·김마리아씨의 三從)가 참석 12시에 작업을 시작했다. 복자 이명서의 무덤 옆에는 그의 아들과 자부의 묘도 있었다.
5월 11일 전주서 이송한 두 복자의 유해는 가톨릭大의학부로 봉안 5월 24일 재확인 정리하여 절두산성당으로, 6월 17일에는 일부를 교황청으로 보냈다.
그런데 이 이장작업에 가톨릭大의학부의 정일천·최월봉 교수가 모두 입회했다. (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