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38) <第二話(제2화)> 榮光(영광)의 敗北(패북) ㉔
발행일1968-11-24 [제645호, 4면]
『정아야 울지마라. 네 심정을 내가 왜 모르겠는냐. 나는 그저 너를 볼 낮이 없다. 그렇지만 사람이란 욕심이 한이 없어서 죽기전에 너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서둘러서 귀국을 해서 버젓하게 내어 놓고 찾을 처지도 못되니까 남몰래 너를 찾으려고 애틀 쓰지 않았겠느냐. 그러다가 바로 내 회사 복도에서 너를 만나니 그만 반갑고 조급한 마음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너를 괴롭혔던 거다.』
『아버지!』
정아는 고개를 들어 윤 사장을 바라보았다. 눈과 볼이 온통 눈물에 젖어있었다.
『저는 아버지가 이렇게 불행하신 줄 몰랐어요. 아까 은실이가 찾아와서 자세히 이야기해 주어서 처음으로 알았어요. 저는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하셨으니까 우리와는 까맣게 동떨어진 세계에서 행복스럽게 지내고 계신 줄 알았어요.』
『고맙다. 네가 이렇게 나를 이해해 주니 나는 지금 죽어도 한이 없겠다.』
윤 사장은 매우 만족한 얼굴이었으나 그도 눈에 눈물이 가득히 고였다.
『그래서 저는 지금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던 거에요. 저는 지금까지 대로 떳떳하게 살 생각이었던 거에요.』
『그럴거다. 지금 와서 아버지라고 나서는 내가 뻔뻔스럽지. 내가 너라도 그렇게 했을 거다. 나는 조금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 거기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아라.』
『저는 아버지가 행복하시면서 늙으시니까 뒤늦게 옛날에 버린 가족 생각이 나서 호감삼아 찾으시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욕심이 너무 지나친 분이라고 미워했던 거에요. 그래서 아까도 마침 정식이가 왔기에 모르는 사람이 귀찮게 구니 가서 쫓아 보내 달라고 일렀던 거에요.』
『응? 정식이라구?』
윤 사장은 청년의 이름이 정식(貞植)이라는 말을 듣고 의아해서 청년을 쳐다보았다.
『정식아 아버지께 인사 드려라. 내가 진작 너한테 말을 해 줄 것을 늦어서 미안하다.』
정아는 일어서서 수건으로 눈물을 씻었다. 정식은 천천히 윤 사장의 앞으로 닥아섰다.
『모르고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어머니도 그러시고 누나도 그리고 아버지는 동남아에 가셨다가 열병으로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그런 줄만 알고 있었읍니다』
정식은 고개를 꾸뻑하여 사과하고는 멋적은 듯이 머리를 긁었다.
『정식아, 그건 어머니께서 너를 위해서 지금까지 거짓말을 했던 거야. 그러니까 어머니는 영원히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을 분으로 생각하신거지. 그래서 차라리 구차한 말을 늘어놓는 것보다 열병으로 돌아가셨다고 그런거다』
정아는 동생에게 변명을 하였다.
『그런데 정아야』
윤 사장이 딸을 불렀다.
『네?』
『사실 나는 너 하나밖에 없는 줄로 알았는데 정식이는 언제 낳았느냐?』
윤 사장은 묻기가 매우 거북했으나 참을 수 없어서 물었다.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아버지가 동남아로 가실때 정식이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대요. 그래서 지금도 어머니는 정식이를 유복자라고 하시는 걸요』
『흥, 그러니까…』
윤 사장은 눈을 잠간 지긋이 감았다.
그 옛날 쓰디쓴 기억이 일시에 마음 가득히 솟아올랐다. 그러니까 윤 사장이 결혼식장에서 나와 자동차를 타고 있을때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정아를 업고 섰던 정아 어머니인 명애(明愛)는 이미 또 뱃속에 정식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딸린 어린생명을 데리고 여자의 몸으로 혼자서 살아 온 명애의 지금까지의 생애는 그 고초가 과연 어떠했을 것인가. 윤 사장은 그 생각을 하고 오래간만에 만난 아들과 딸 앞에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졸아드는 듯 했다.
『알겠다.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무심히 살아왔으니 내가 너희들 한테 이제 와서 어떻게 아비라고 큰소리를 하겠느냐.』
윤 사장은 길게 한숨을 지으며 손수건을 눈으로 가져갔다. 정신은 돌아왔지만 온몸에 힘이 빠지고 머리가 무거웠다.
『아버지, 몸도 성치못하신데 이제지 나간 이야기는 잊어버리세요. 그까짓 이야기는 자꾸만 하시면 뭘 해요. 과거 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지 않아요.』
정아가 위로하듯 말했다.
『글쎄. 그렇게 해주면 나는 좋겠지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해줄 수 있겠느냐?』
『죄는 무슨 죄에요. 한때 실수로 그러신걸 이제 와서 따지면 뭘 해요. 저는 벌써 다 용서해 드렸으니까 염려 마세요.』
말을 마치고는 또 설음이 복받쳐서 정아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쌌다.
『정아야 고맙다. 이 못된 아비를 그렇게 생각해 주니 내 마음이 저절로 훈훈해 지는구나.』
윤 사장도 또 손수건을 꺼냈다.
『정식아』
윤 사장은 멋적은 듯이 서있는 정식을 바라보았다.
『네?』
『사실은 아까 네가 다방에서 나에게 이야기할 때 너의 태도를 보고 순간적으로 느낀바가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너는 나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기보다도 그 이상한 느낌을 알아내려고 애를 썼던 거다. 그런데 도무지 알 수가 없다가 네가 눈을 부릅뜨고 흘겨볼 때 문득 깨달았다. 이 청년의 모습은 내가 젊었을 때의 모습과 똑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