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란서 교회론 학자인 프리스끄 신부의 내한을 기회로 성직자 양성 전국위원회와 수녀양성 임시위원회 주최로 춘천 성심여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란 무엇인가』란 주제하에 11일 오후8시부터 14일 정오까지 강연회가 있었다. 프리스끄 신부는 작년 이맘때도 역시 같은 장소에서 「사제직」에 대한 강연을 한 바 있다. 복음 宣敎가 전교회에 부과된 중대한 사명이란 것은 第2次 「바티깐」 공의회가 명백히 한바이다. 현재 한국가톨릭은 되도록이면 많은 미신자가 개종하여 세계를 받는 것을 복음선교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통계표에 오르는 개종자의 숫자에만 흥미를 느끼고 있는 실정이며 소위 지성인 중에는 다만 정신수양을 위해서만 가톨릭을 믿고싶다는 태도가 보인다. 이러한 현실에서 볼때 이번 프리스끄 신부의 강연회는 우리의 복음선교의 태도를 재검토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이에게 전해야 할 기쁜 소식은 오늘 교회안에 생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 생활하신 그리스도께 나타난 성부의 사랑을 모든 이에게 선언하고 현존케 해서 인류의 응답을 성신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의 영광을 위해 돌려보내는 것이 복음선교의 내용이라 했다. 교회를 제도처럼 보지 않고 누룩처럼, 형제들 가운데 사는 매우 구체적인 하느님의 백성처럼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힘과 생활의 증거로써 성무의 나라를 선포하신 그리스도는 영광을 완전히 나타내실 때까지 하느님의 백성을 통해 예언직을 성취하실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시대의 특징을 잘 이용한다면 그리스도 안에 자녀다운 은혜를 받게될 것이다. 우리는 이 희망을 마음깊이 감추어 둘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피조물로서의 충심을 지킴으로써 또한 세속생활의 구조(構造)를 통하여 그 희망을 나타내야 한다.
이렇게 복음선교활동은 생의 증거로써 말씀의 선포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모인 사람들의 볼 수 있는 공동체가 형성하는 것이다. 그위에 또한 선교활동은 보이는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과 행동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으로 실현되는 업적에 참여할 때도 행해진다. 그는 또한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복음선교와 인간화선교와 인류진흥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정의했는데, 즉 그것은 다른 사람들 가운데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사실 선교활동은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의 형성과 인류에 대한 봉사라는 끊을 수 없는 관계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공동체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써 세상에 봉사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요, 그리스도를 믿는자의 공동체와 각 그리스도 신자가 자기가 사회에 봉사하는 자란 자각이 없다면 교회는 봉사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을 수가 없을 것이다.
넷째 「테마」에서 그는 우리는 현세계에 현존하고 있는 이상 형제들에게 책임을 느껴야 하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격리되어있지 않다는 의식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교적 애덕의 보편성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구원의 공통적인 면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사실 선교활동의 결과 탄생한 교회는 배타적 집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신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동적 사랑으로써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증인이 되도록 불리운 자이다. 그리스도 신자는 하느님의 나라가 갖는 힘과 행복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소리높이 선포하는 자이다.
이 약속에 대한 신앙은, 신자들을 이 세상에서 도피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이 세상에 살면서 일하기 위해 필요한 희망을 갖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계획이 성취도도록 협력케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띠아니즘」이 이 성취의 신비라면 다른 모든 종교와는 같지 않고 모든 종교 위에 오는 成就이다.
따라서 豫備복음선교 단계에 있어서, 充足感을 느끼는데서 오는 物質的 행복 및 좋은 환경에서 오는 樂觀的 행복 즉 감정적 행복은 물론이요, 자기 向上과 윤리에서 오는 정신적 행복으로 만족하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그리스도교적인 종교적행복에가지 끌어올리도록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복음선교를 위해 공동책임성을 갖도록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2 「바티깐」 공의회는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 제도가 첫째가 아니요 하느님의 백성이 첫째이며 신앙의 표현형식보다 역사에서 남과 만나는 구체적인 인간이라 했다. 그리하여 이세상에서 일하시는 성신의 말씀을 같이 듣는 것이다. 성부의 계획을 알기위해 시대의 특징을 연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념에서 권위는 무엇보다 먼저 봉사란 모습을 갖게된다.
한국가톨릭은 아직도 권위 意識에 사로잡혀 거기서 좀처럼 헤어날 줄을 모르고 있다. 요한 23세가 1963년 4월 聖木요일 外交사절단에게 하신 강연은 매우 복음적이다. 즉 『중요한 것은 보이는 태도보다 정신이다. 이 경고는 다만 교회지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즉 모든 권력 권위의 行使는 봉사하는데 있고 교황은 자신을 즐거이 하느님의 「종의 종」이라 부른다. 스스로가 모든 이의 종임을 자각하고 그렇게 노력한다는 것이다. 인간사회에 책임을 지는 이가 聖木요일의 최후의 교훈을 명심하고 겸허한 봉사와 모든이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정신으로써 권위를 行使하면 할수록 그것이 사람들에게 더 잘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고 했다.
또 순명은 무엇보다 먼저 성신께 충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건설에 능동적인 부분을 가지게 된다. 그는 노력의 對等關係, 노력의 사용방법 등이 공동책임성이 아니요 본질적으로 같이 발견해야 하나 또는 볓가지 노력을 모두가 책임지는 것, 같이 만들고 같이 결정하기 위해 깊이 의논하고 서로 들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그토록 부르짖는 對話이다. 또 복음적 형제정신을 갖는 것 등이 공동책임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현 포교에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발견해야 할 이 포교에서 그 主演을 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宣敎는 교회의 탄생때부터의 본질이다. 선교에 대한 의무는 신자의 신분에서 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자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 내적 「다이나미즘」을 십분 발위해야 한다. 그때문에 이나라에 나아가서 전세계에 선교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야 할 것이다.
申相祚(本社 論說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