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깐」 공의회를 전후하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사이를 메우고 일치의 「무드」 조성에 큰 공적을 세운 오거스틴·베가 추기경은 지난 11월 16일 37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폭넓은 아량과 해박한 지식은 폐쇄적이었던 가톨릭 신학사조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요한 23세 교황이 교회 일치문제를 「바티칸」 공의회의 중요한 의제로 정하였을 적에 베아 추기경은 그의 오른팔이 되어 획기적이며 새로운 묘안을 수없이 창안하여 공의회에 제시하였다.
「교회일치에 관한 율령」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종교자유선언」 등의 결의문은 모두 베아 추기경의 머리를 거쳐 나온 베아정신의 결정(結晶)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그의 포도밭인 교회에 수시로 일꾼을 보내어 그 교회를 가꾸고 인도하시는 것이 구세사에 역력히 들어난다. 베아 추기경이야말로 『바티깐」 공의회의 위대한 개혁사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보내신 일꾼이다. 하느님은 베아 추기경을 통하여 교회위에 많은 지혜와 은혜를 내리신 것이다.
1960년 요한 23세 교황에 의하여 「바티깐」 공의회의 준비부서인 교회일치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을 적부터 그는 「일치의 사도」로서 「바티깐」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자로 큰 각광(脚光)을 받아왔다. 그래서 그는 「바티깐」 공의회에 모인 진보적이며 자유적인 사상을 가진 주교들의 대변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본시 종교개혁의 발생지인 독일에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보다 도 교회의 분열에 대한 혐오(嫌惡)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교회가 하나가 되는 운동에 마음과 몸을 다바쳐 일한 것이다. 「바티깐」 공의회석상에 갈려나간 형제들을 「업저버」로 초대하여 그들과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대화를 나누어 일치에 대한 가톨릭의 염원과 계획을 설명하였다. 그는 몸소 여러 번 타교파 지도자들을 방문하여 일치의 문호를 넓혔다.
특히 세계 교회 협의회(W·C·C)와는 빈번한 접촉과 대화로 가톨릭이 W·C·C의 회원이 될 수 있는 일보직전까지 접근시켜 놓은 것이다.
배아 추기경의 전공학문은 성서학이었다. 그가 일치운동의 사도가 되기전에는 성서학자로서 많은 저서를 내는 동시에 한때는 「로마」에 있는 성서대학의 학창직까지 맡아 보았다. 삐오 12세 교황의 명으로 「시편」을 새로 번역해서 신자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새번역(라띤어)을 「베아번역」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는 또한 훌륭한 영혼의 의사였기 때문에 그에게 고백의 성사를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삐오 12세 교황은 당시의 베아 신부를 자기의 고해신부로 정하고 있었다. 베아 추기경은 가셨지만 「베아정신」은 우리 가슴속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베아정신」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결손과 사랑이 일치의 정신이다.』 『남의 자유를 존중하라』 『교회일치는 앞날에 완성될 이상적인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마음의 일치운동을 전개하자』
박양운(한국주교단교회 일치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