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話(대화)를 위한 「시리즈」] 慈悲(자비)에 관하여 ⑥
이웃사랑없는 神(신) 사랑은 올바른 求道者(구도자)의 姿勢(자세) 아니다
“참된 道(도)는 편협한 敎理固守(교리고수)서 벗어나”
眞理(진리)는 마음안에 있는 것
淨化(정화)된 마음으로 慧眼(혜안)을
발행일1969-02-23 [제657호, 2면]
불교는 마음의 淨化를 가르치는 宗敎이다.
불교신도란 마음이 온전이 淨化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라이다. 위로는 「샤아카무니 · 붇다」의 모범을 따라 모든 그릇된 생각을 그 마음속에서 뿌리빼려고 노력하며(上求보리), 밑으로는 뭇 生命있는 자들이 그 生命을 온전히 발전시키도록 갖은 方便을 다하려고 노력하는(下化衆生)자이다.
이 橫的努力없이 縱的努力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저 縱的努力 없이 이 橫的努力도 있을 수가 없다.
진정한 의미의 불교도는 一定한 敎理體系만을 편협하게 고수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근본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흔히 思想史的으로 小乘佛敎다, 大乘佛敎다 하고 구분은 하지만 적어도 진정으로 지혜로운 眼目을 가진 사람에게는 宇宙의 萬象, 人生의 萬事가 다 진리 아닌 것이 없음을 깨닫는다. 이것만이 유일한 絶對의 것이라고 주장했을때 그 「이것만」이라는 것은 이미 絶對的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에 평등하고 모든 것을 두루 비치지 못하는 그 무엇은 결코 절대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불교도의 눈(혜안)에는 그 마음과 遊離된 어떤 客體도 결코 진리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라는 評價가 내려지고 있는 어떤 事物에서도 지혜로운 눈은 不變의 眞理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들어내는 滋養物로 삼는 것이다. 진정한 불교도의 修道原理, 行動指針은 따라서 바깥 世界의 어느 客體的存在 그 자체로 있다기 보다도 자기 마음 속의 가장 심오한 안척에서 솟아나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그 숱한 敎訓, 오늘날 經典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一切의 敎訓은 바로 그 마음 속 깊숙히 간직된 그 영원한 목소리의 表現에 不過한 것이다. 죄많은 우리 중생이 듣고 믿어, 그대로 실천해야 할 가장 값있는 목소리는 우리의 言說과 思議를 초월한 그 原初的 音聲인 것이다.
그 소리를 들으며 실제로 그 말씀처럼 살고자 하는 求道者를 불교에서는 「보디살트바」(깨달은 衆生) 즉, 보살이라고 하는 것이다. 顯揚聖敎論이란 책에는 그 보살을 다음과 같이 定義하고 있다.
첫째, 보살은 여러가지 종류와 形式의 불교교리가 역사상에 나타났지만 眞理의 원천인 마음을 통해 배우는 자이므로 그가 따르는 行動原理가 지대하다.
둘째, 보살은 이미 그 마음의 깊이를 온전히 들어내고자 決心한 자다. 따라서 그 뜻하는 바가 크다.
셋째, 보살은 그가 의거해야 할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훌륭히 이해하는 자이다. 그에게는 『그렇다』 할만한 原理와 原則이 있는 것이다.
넷째, 따라서 보살에게는 不安과 恐怖 또는 悲觀이나 絶望이 있는 것이 아니다. 희망과 기쁨 自信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다섯째, 보살이 참으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일 수 있는 까닭은 지혜와 慈悲를 양식으로 삼고 그것을 성취해 가는 까닭이다.
여섯째, 보살은 하루아침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친 修道의 끝에 이루어지는 存在다.
일곱째, 그리하여 보살은 『비할 바 없이 온전한 깨달음(無上正等覺)』을 원만하게 이룩하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국에 도입되어 아직까지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 기독교의 일반적 경향은 이와같은 보살이 가야하는 마음의 淨化란 일을 너무나 輕視 또는 無視한 사실이라고 믿어진다. 그것은 특히 일반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神學과 이에 바탕한 信仰生活에서 혀저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人間다운 人間이 되려는 생각에 앞선 神中心主義, 修道에 앞선 信仰, 이웃사랑에 앞선 하느님 사랑, 俗에 대한 聖의 優位의 강조, 이 모든 경향이 한국에서는 기독교에서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 도두러지게 눈에 띄는 경향인 것이다.
자비의 源泉인 그 영원한 마음에 관하여 元曉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一部만을 인용해 보자.
(全文은 拙著 元曉思想 第一卷 第44面 以下 參照)
『그것은 깊고도 고요하고 맑고도 평화로운 것이니 깊고도 또 깊어 어찌 그 모양을 말할 수 있으랴…크다고 할까, 아니 어느 구석진 곳에라도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고, 작다고 할까, 아니 어느 큰 것이라도 감싸지 못함이 없다. 있다고 할까, 아니 그 한결같은 모습이 텅 비어 있고, 없다고 할까, 아니 萬物이 다 이로부터 나오네. 무어라 이름붙일 수 없으므로 감히 이를 大乘이라 한 것이다. 그것은 광활한 것이다. 大虛空과 같이 私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平等한 것이다. 大洋과 같이 지극히 公平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