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9) 놀람 ⑤
발행일1969-02-23 [제657호, 4면]
박훈씨는 이번에는 대머리가 벗겨진대로 애용의 베레를 쓰지않은 모습으로 사람틈에 끼어나오고 있었다.
『박선생.』
현주는 나오는 박훈씨의 앞으로 다가가서 반가운 어조로 발음했다.
『안 나와주셨군요. 고맙소.』
들고온 것은 조그만 서류가방. 그것을 저도 모르게 받는 현주에게 박훈씨는 웃으면서 말했다. 서류가방을 받아들었으나 현주는 그런것을 깨닫자 어쩐지 경솔한 행동이 아니었던가고 뉘우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대로 둘은 별로 말이 없이 역구내에서 벗어져 나왔다.
『그동안 무탈했었군요. 퍽 건강하게 보이는데…』
말이 없다가 박훈씨는 너무 말이 없는게 실례라고 생각된다는듯이 이렇게 발음했다.
『그래요? 참 선생님 독감에… 지금 괜찮으세요?』
『보는대로요.』
별로 여위어 보이지 않았으나 약간 스마트했다. 새 코트를 입은 탓인가? 박훈시는 역전의 「택시타는 곳」으로 발을 옮겨놓았다. 그러나 거기엔 벌써 명절날의 극장매표구 앞처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장사진(長蛇陳)을 치고 있었다. 그 맨꼬리에 서게 되었다. 언제 차례에 올지 기약할 수 없었다.
『버슬타기로 하세요.』
현주는 박훈씨가 어디로 가는 것도 묻지 않고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버스? 버슬타기에는 반지버린 위치예요.』
『어딘데요?』
그제야 현주는 갈곳을 물었다.
『가깝다면 가깝고…』
박훈은 모호하게 대답했다.
현주는 굳이 묻지 않았다. 서울역엔 택시가 많이 오기도 하고, 사람을 실고 번들나게 가기도 했다. 어느사이에 현주네는 행렬의 중간쯤으로 다가서게 됐다. 몇마디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에 앞사람들이 쭉쭉 빠져 중간위치에 서게된 것이 현주로서 재미 있었다. 현주는 무슨 일에는 지긋이 참는 것이 가장 훌륭한 미덕(美德)이고, 그런뒤에 반드시 영광이 찾아온다고 문득 생각했다. (나는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하나.) 현주는 외국으로 유학을 가게될 일을 또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결정적인데까지는 도달해 있지 않으나 지긋이 참으면 거기까지 닿고 말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면 고생이 되겠지. 그러나 그걸 이기고 질긋이 참으면 돌아와서는 건축설계자로서 권위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여성으로서…)
박훈씨가 무뚝뚝 이야기가 별로 없으니 현주는 꿈을 꾸는데 아무 장애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둘은 십여명밖에 앞에서 있지 않는 자리에까지 다가서게 됐다. 거기에는 광장에 와서 닿는 택시를 한 하나 볼 수 있었고 거기는 내리는 사람도 분별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현주는 와서 닿는 택시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저건 부부다. 결혼반지 삼년쯤 됐을까? 저 부인은 지방도시의 다방마담인지도 모른다. 시골서 온 어머니를 마중하기 위해 나오는 선량한 아들이군? 이렇게 상상하는게 재미있었다. 앞에 다섯 사람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택시 한대가 와 머물었다.
문이 열리면서 먼저 내리는 사람, 여자였다.
『앗, 혜경이…』
현주는 거의 입밖에 내어 발음할 뻔 했다. 먼저내린 혜경이를 따라 차삯을 치루고 신랑 주군이 내린다. 역시 행복에 겨운 정다운 모습들이었다. 그걸 과시하려는 듯이 가벼운 성격인 혜경이 공연히 두리번거리다가
『야, 현주가 아니냐?』
줄에 서 있는 현주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거냐?』
혜경이 현주에게 뛰어왔다.
『마중나왔어.』
현주는 준비가 없었으므로 불쑥 이렇게 대답했다.
『마중?』
하면서 센스가 빠른 혜경이가 옆에 선 박훈에게 시선을 던졌다.
『박선생이십니까?』
박훈씨가 현주에게 뛰어와 호들갑을 떠는 여자를 재미있다는 눈으로 보자 혜경이는 끄덕 하면서 말했다.
『예.』
『현주한테서 들었어요.』
『그랬어요?』
박훈씨는 현주와 눈이 마주치면서 이렇게 발음했다.
『미스터 주 이리오세요』
뒤에서 서성거리는 주군에게 혜경이는 얼른 오라고 재촉했다가
『여보들 앞을 다가서시오.』
혜경이 내린차에 타고 또 한차에 타고 나니 현주네가 맨앞이 되었는데도 혜경이의 호들갑 때문에 제자리에 서있으므로 뒷사람들이 시비쪼로 하는 말이었다.
박훈씨와 현주양은 맨앞자리로 다가섰으나
『현주야. 너 잠깐 나와서 우리 차나 마시고 이야길 하다가 들어가려무나…』
그리고 혜경이는 박훈씨를 보고
『박선생님. 그럭하세요. 제가 한턱 하겠어요. 제 약혼자를 소개해드릴게요. 선생님 좋은 말씀도 들을겸.』
말하고 현주의 손을 잡아 열밖으로 끌어내려고 했다.
또 차 한대가 왔다.
『안타실 작정이오?』
하는 소리와 함께 현주네 뒤에 있던 사람이 뛰어나가 차를 잡아 탔다. 하는 수 없이 현주와 박훈씨는 혜경이의 뜻대로 그렇게 지긋이 참고 기다렸던 일렬(一列)에서 빠져 나오게 됐다.
광장에 나서자 혜경이는 더욱 기쁜듯이 그러나
『미안합니다. 그렇더라도 박선생님 저희들 축하해 주셔야 하지 않아요? 현주도 우인대표로 참석했지마는 저 오늘 약혼했거든요…』
그리고 역시 뒤에서 서성거디는 신랑 주군을 돌아보면서
『얼른 박선생님께 인사 드리세요』
재촉했다. 수굿한 주군은 벙글벙글 하면서 다가와서 이름을 대면서 끄떡 인사를 했다.
『그렇소? 박훈이오.』
박훈씨는 구김살 없이 응수해주었다.
『자, 저기 다방으로 갈까요.』
혜경이 가리키는 곳은 서울역 식당 다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