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대림절의 신비
지난 호에 대림절에 대해 역사적으로 조금 살펴보았다. 그것은 대림절의 신비 즉 『만일 거기 어떤 큰 성사가 숨어있지 아니하면 교회는 대림절을 거행치 않으리라』고 한 성 베르나르도의 말대로 대림절의 성사를 말하고 저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대림절의 이 성사란 성 바오로가 「에페소」인들에게 말한 그 신비이다.(에 1·9~10)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우리가 『주 다시 오실 때까지』(코린토전 11·26) 거행하는 그러한 전례의 신비이다.
교부들은 성탄과 공현절에 主가 처음으로 오신 것을 전례적으로 상기시킬 뿐만아니라 그의 영광스러운 둘째 내림도 상기시킨다고 했다. 레오는 『우리는 이미 영원한 유산을 받았다.
박사들이 외양간에서 조배한 그를, 우리는 하늘의 전능하신 主로 흠숭한다』고 했다. 막시 모도 같은 사상을 말했다.
『우리는 말구유에서 울고 있는 그리스도를 더 찾지 아니하고 하늘의 왕이신 그를 조배한다.』
여기서 우리는 末世的 信心을 본다. 이러한 설교에서 보아 역사에서 나온 典禮的 대림절은 해마다 主께서 거룩한 전례로 당신 교회를 末世의 문턱까지 인도하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재림을 상기하고 고대하는데까지 이르게 되어야만 했다. 옛 전례독서를 보면 中世紀初에 대림 제1주일의 복음은 예수의 개선적인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것이다. 성주간을 시작하는 날과 마찬가지로 대림절을 시작하는 이날, 그 독서를 하는 것은 主께서 영광 중에 오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약속된 자로 나타나는 主의 내림에 대한 신비이다. 내림의 모든 신비는 主의 첫내림 때부터 「빠스카」의 신비를 상기하면서 교회의 희망을 안은 채 그의 영광스러운 재림 때까지 구약의 간택된 백성의 「메시아」적 고대에 응하는 거기 나타난다. 그러므로 대림절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 이 복음독서는 해마다 성탄과 공현절에 전례적 來世를 준비하고 고대하면서 主의 왕다운 내림을 상기시켰다. 대림절 제1·2주일 성무일도에서는 「오실 왕이신 주를 와서 흠숭하자」고 노래한다.
제3주일부터는 성탄이 가까워오므로 교회의 來世觀도 또한 強調된다. 「主가까이오시니 와서 흠숭하자.』 성탄전야에 이 고대가 벌서 이루어진듯하다. 「오늘 主오실것을 너희는 알라. 아침에 그 영광을 보리라』하고 노래한다. 그러나 성탄 밤에 모는 것이 변한다.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탄생하셨으니 와서 흠숭하자』하고. 그리스도의 겸손한 탄생을 노래할 때 영광스러운 내림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듯한 인상을 받는다. 여기 부활전야의 신비롭고 성사적인 현실과 비할 수 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의 발현을 고대하다가 자정에 부활하신 시간이 지나면 부활 첫미사로 그 거룩한 기념일을 축하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구원의 신비를 완성하시어 영광 중에 오시는 그리스도 왕을 고대하지만 그의 성탄을 상기하는 시간에 교회는 육신을 취하여 겸손하게 오시는 그의 탄생을 성대히 기념한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그 전례신심과 분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末世觀을 냉정히 계속 묵상한다. 예수공현축일 복음낭독 후 그해의 큰 축일을 告하는 습관이 있다. 그것은 典禮周年에 구원의 업적을 기념하는 동안 主의 재림을 어떻게 고대하는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먼저 성탄축일을 상기한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며칠 전에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뻐한 것과 같이 지금 천주의 자비로 그의 부활의 기쁨을 고합니다』하고 7순절과, 재의 수요일, 부활, 승천, 성신강림 등의 날짜를 알린 후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대림 첫주일은 X월 X일 입니다. 존경과 영광이 그에게 영원히. 아멘』하고 끝난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계속적인 대림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이 명확히 보인다.
재림은 현재와 미래처럼, 내림과 고대처럼 동시에 나타난다. 대림절의 신비 속에 그리스도는 언제나 거기 현존하는 이처럼 동시에 오시고, 고대의 대상이 되기를 그치지 않는 이처럼 나타난다.
이 신비에 사는 그리스도 신자는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사람이라고 뉴먼 추기경이 말했다. 대림절을 지내는 동안 「메씨아」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꽉찬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과 꼭 같이 구약성서 귀절을 읽고 노래하고 그것으로 기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되지 아니한 인류의 상태에 우리를 두는 것이 물론 아니요 오직 「메씨아」가 이미 왔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영혼을 준비하고 구약의 義人들의 例에서, 그리고 그들의 신심과 감정과 희망에서, 우리 안에 적당한 준비를 하도록 좋은 표본을 찾는 것이다.
신스떼파노 신부(본사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