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話(대화)를 위한 「시리즈」] 慈悲(자비)에 관하여 ⑦
大乘(대승)은 그 生命自體(생명자체)
眞正(진정)한 覺者(각자)는 私(사)와 偏執(편집) 없어야
발행일1969-03-02 [제658호, 2면]
(承前) 지극히 公平한 까닭에 動과 靜이 함께 이루어지며 그 私가 없는 까닭에 染과 淨이 다 하나가 되는 것이다. 染과 淨이 하나가 됨으로 眞 · 俗의 차별이 없고 動과 靜이 같이 하는 까닭에 昇降의 차별이 있는 것이니, 昇降의 차별이 있으므로 感應의 길이 열리며 眞俗이 平等하므로 思辨의 길이 끊기는 것이다.
思辨의 길이 끊기는 까닭에 眞俗平等의 本體를 體得한 자가 그 그림자와 소리(影響)를 파고가되 거침이 없으며, 感應의 길이 열리는 까닭에 이를 비는자(祈子)가 觀念과 形象을 초월하고 돌아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本體로부터 생긴 그림자와 소리(影響)가 形態나 言說이 아니요, 이미 그런것을 초월한 것이니 다시 무엇을 초월하고 어디로 들어간단 말인가?
이것을 일컬어 道理 아닌 至極한 道理라 하며 이것을 일컬어 肯定 아닌 大肯定이라 하는 것이다. 입을 다물고 지혜로 그것을 目擊한 大丈夫가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言說을 넘어선 大乘을 論하고 思慮가 끊긴 大乘에 깊은 믿음을 일으키게 할 수 있으랴!』
慈悲의 源泉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同時에 眞理의 源泉인 것이다. 우리는 元曉의 이 글을 다소 부연해서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起信論說(起信論에 대한 元曉의 註釋書)에서 大乘 즉 一心에 관하여 짤막하게 요약한 元曉의 글을 지혜와 慈悲의 源泉 그자체에 관한 神秘的 直觀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위의 인용한 元曉의 그 말씀을 土臺로 필자 자신의 見解를 피력함으로써 對話를 위한 시리즈 「慈悲에 관한 章」을 一旦 끝맺음하려 한다. 元曉는 그 글의 前半에서 大乘 즉 一心의 本體를 存在論的인 입장에서 설명하려고 試圖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然夫大乘之爲體也 소언空적 담爾沖玄이니 玄之又玄之 기出萬像之表며 적 之立又적 猶在百家之談이니라 한 곳을 譯者는 『大乘이 무엇이냐. 그것은 『깊고도 고요하고 맑고도 평화로운 것이니 깊고도 또 깊어 어찌 그 모양을 말할 수 있으랴! 고요하고도 또 고요한 그것은 마치 사람들의 말뒤에 숨어있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서투르게 옮겨 볼 수 밖에 없었지만 元曉는 여기에서 우리인간이 가능성으로서 지니고 있는 「佛種) 즉 「覺의 씨앗」 즉 마음, 그리고 이른바 覺者가 온전히 歸一한 그 「佛心」 「覺」 그자체가 과연 무엇이냐를 말하고 있다. 元曉는 단적으로 그것이 空적하면서도 沖玄한 것이라고 했는데 다시말하면 空하면서도 圓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大 · 小, 有 · 無의 相對的 범주를 벗어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 大乘, 즉 큰 수레의 體가 결코 단순한 이름이나 槪念이 될 수 없는 生命 그 자체임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지혜의 마음, 慈悲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一切의 더러움과 動搖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며(空적), 그러면 그럴수록 맑고 평화롭기 그지없는(沖玄) 마음이다. 言說과 表現을 絶한 것이다. 말하면 거짓이요, 그리면 거짓이 될 그처럼 淸淨한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우리 凡夫들은 그것을 우리의 말과 表象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이다. 그 마음은 어느 구석진 곳에 라도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고(入無內而莫遣), 그 마음은 어느 큰 것이라도 감싸지 못함이 없다(포 無外而有錄)라고 한다. 또 그 마음은 그것을 쓰매 한결같이 텅 비어있는 듯하지만, (一如用之而空) 사실은 그 마음을 타고 萬物이 다 나온다. (萬物乘之而生)고도 햇다. 이러한 存在를 일컬어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中」이라 불렀고, 또 이러한 存在를 모든 相對性을 떠난 자리라 하여 非有, 非無, 非非有, 非非無라고도 하며 한없이 相對的 槪念의 울타리를 否定하는 論理를 써서 表現하려고 했던 것이다. 불교의 無가 단순한 虛無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극히 有에서 執著하기를 좋아하는 西洋人들 사이에서 마저도 常識化된 사실이다. 元曉는 계속해서 그 글의 後半部에서 지혜의 慈悲의 源泉인 이 마음이 어떠한 道理를 지니고 있는가를 이야기해간다. 그 마음의 本體는 광하고 灣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