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現社會(현사회) 潮流(조류) - 嶺南大學(영남대학) 가톨릭학생회주최 思想講演抄(사상강연초)
假我(가아)서 眞我(진아) 찾아 主體(주체) 確立(확립)
절대적 평등자비사상 추구하는 종교 以前(이전)의 道(도)
現代人(현대인)은 自我喪失(자아상실)코 知識(지식)과 行動(행동)이 유리
현대인은 자아(自我)를 잃고 있다. 즉 자아 상실증(喪失症)에 걸려있다. 이러한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결점을 열거하면 첫째 비(非)자주성이며, 둘째 비협조성이다. 일본인 세사람과 한국인 한사람이 대결하면, 한국인이 이길 수 있지만, 한국인 세사람은 일본인 한사람한테 대번에 진다.
한국인은 마치 모래알 같이 단결력이 없다. 세째 우리민족은 허위와 가식이 많아 솔직하지 못하고 知行이 不一致하다. 지식과 행동 이 유리돼있는 이같은 현상은 특히 지식층에 많다.
네째로 손꼽을 수 있는 결점은 비근면성이다. 「손에 흙을 묻히지 않은 팔자」를 이상으로 삼는다. 개화기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정구를 치는 것을 본 점잖은 선비는 『저런 일은 하인을 시켜하면 좋을 텐데… 답답한 사람들이로고!』하더란다.
이제 불교의 성격을 말하겠다. 불교를 종교라기보다 불도(佛道)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불도는 「나(假我)를 버리고 나(眞我)를 찾는 절대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도(道)다. 불도는 절대적인 평등사상과 자비사상을 추구하는 도(道)인 것이다.
가짜인 「나」는 우주전체에서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현상계의 모든 것은 흐리기에 무상(無常)하고 허무하다. 반면에 진짜인 「나」는 변함없고 평등하고 절대 자유인 세계, 즉 본체계이다. 가짜인 「나」를 버리고 진짜인 「나」로 돌아가려는 것이 목적이기에, 불도자는 자아(自我)의 불성(佛性)을 발견하여 주체성을 찾고, 나아가 남을 자기와 같이 아끼는 평등사상 자비사상을 갖기 위해 불도를 닦는다.
인간은 변하는 데에서 영원을 찾고, 한정된 데에서 무한을 찾기 때문에 충돌이 생기고 고민이 생긴다. 그러므로 진짜인 「나」를 찾을려면 이같은 가짜인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3독심, 즉 ①분수에 넘치는 것을 바라는 탐심(耽心)과 ②어리석은 마음과 ③성내는 마음을 끊어야 진짜인 「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滅하면 生하기 때문이다.
잠을 포기할때 잠이 온다. 아니 잠을 포기하려는 생각조차 버릴때 진짜로 잠이 온다. 원효 대사가 밤중에 목이 말라 물을 퍼마신 그릇이 이튿날 날이 밝았을 때 깨어보니 해골바가지였단다.
원효 대사는 여기서 크게 깨달은바 있었다.
진아(眞我)의 세계는 생사(生死)의 문제가 없어지는 世界, 상대성이 없어지는 세계다. 진짜의 「나」를 찾으면, 내가 바로 우주의 주체자가 됨으로써 환경을 지배하게 된다. 자기 스스로를 지배하는 자가 바로 우주를 지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불도는 또한 인과(因果)에 철저한 윤리의 도이다. 인간은 뿌린 씨대로 거둬들인다. 따라서 현재에 뿌린 씨는 미래에 반드시 거둬들여야 한다. 이같은 인과(因果)에서 강한 윤리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불도는 과학적이며 철학적이면서도 초과학적 초철학적인 실천적 행(行)을 중시하는 도이다.
연기론(緣起論)은 하나의 과학적 철학적 이론이지만 이는 각(覺)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피안(彼岸) 즉 불성(佛性)에 이르면 지혜의 배는 도리어 집착이 되는 대상밖에 되지 않는다. 불도는 지혜로써 각(覺)하여 행(行)으로써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현사회는 자아상실증에 걸려 물질적 노예가 돼있으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분열을 낳고, 순간적인 쾌락에 도취돼 있으며 지성인의 지성과 행동이 유리돼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민족성의 고질인 비자주성 비협조성 비정직성 비현실성이기도 하다. 이같은 현사회의 병폐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불도를 믿고(信) 깨닫고(解) 행해야(行)되리라고 생각한다.
(글에 대한 책임은 기자에게). (烈)
정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