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40) <第二話(제2화)> 榮光(영광)의 敗北(패북) ㉖
발행일1968-12-08 [제647호, 4면]
『회사에 연락해서 서무과장이 곧 이 병원으로 온다고 했는데요.』
『그렇다면 미안 하지만 서무과장은 미스·양이 여기서 기다렸다가 정아의 숙소로 데리고 와 주어.』
『네.』
그리하여 윤 사장은 정식과 정아의 부축을 받아 정아의 숙소로 향하였다. 한팔은 아들 정식에게 의지하고 또 한팔은 딸 정아에게 의지하여 걸어가는 윤 사장은 말 할 수없이 기쁘고 감격하였다.
『정식아』
『네?』
『정아야』
『네?』
윤 사장은 아들과 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지금 죽는다고 해도 이제는 한이 없다.』
『그런 말씀 마세요. 어떻게 해서든지 사셔야지. 왜 자꾸만 돌아가신다는 말씀만 하세요.』
정아가 힘차게 말하였다.
『물론 나도 지금은 좀 더 살고 싶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 지나친 욕심이다. 이미 나는 천주께서 주신 생명과 시간을 비뚜러지게 다 소비해버린 후인 것이다』
『아버지?』
정아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도 천주님이란 말씀을 하시는군요.』
정아의 얼굴에는 감격하는 빛이 완연했다.
『너와 정식이가 섬기는 분을 내가 섬기지 않고 어쩌겠느냐. 그리고 지금 와서 나의 한평생을 생각하면 거기에는 어떤 깊은 뜻이 있는 것 같다.』
『무슨 뜻이어요. 아버지?』
정아는 미소 지으며 윤 사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는 똑똑히 보고 있다. 사람의 일생과 그가 가져야할 태도와 바른길이라는 것을 나는 손에 잡을 듯이 느끼고 있다. 이런 귀중한 느낌을 갖기 위해서 나는 너무도 멀고 비뚜러진 길을 걸어온 것 같다. 이제 나의 앞에는 인생의 가장 큰 수수꺼끼이고 신비인 죽음이 가로 놓여 있다. 만일 내가 그런 느낌이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면 얼마나 마음이 캄캄했겠느냐. 그렇지만 지금 나의 마음은 태양처럼 밝다. 나는 비록 큰 죄인이지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죽음을 통하여 신의 앞으로 나갈 것 같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나의 인생의 뜻이다. 틀렸느냐?』
윤 사장도 미소 지으며 정아와 정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는 아직 나이 젊어서 깊이 이해하기 힘들지만 아버지께서 그렇게 밝은 곳으로 나오게 되신 것은 저희에게도 큰 행복입니다.』
정식이가 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너희들을 반갑게 만나게 되지 않았느냐 만일 내가 아직도 그릇된 야망 속에 묻혀있었다면 너희는 영영 만나지 못하고 말았을 거다』
세 사람은 이윽고 정아의 숙소에 이르렀다.
『아니 그런데 이분은 아까 내짐을 들어다주시던 그분이 아냐. 그런데 벼란간 어딜 다치셨나 웬일이야?』
주인 마나님이 놀라서 윤 사장을 맞이했다.
『몸이 조금 불편해서 그럽니다. 덕분에 점아 남매를 만나서 이렇게 잠시 다녀가려고 왔읍니다』
세 사람은 정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옆으로 돌아선 뜰 아랫방인데 비록 초라하되 깨끗이 정돈된 처소였다. 윤 사장은 방에 들어가서 방을 면밀히 둘러보았다. 윗목에 조그만 책상이 있고 벽에 선반을 매어 성모상을 단정히 모시었고 그 위에는 나무로 묘하게 깎은 십자고상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책상위에는 자개박은 사진틀에 사진이 들었는데 자세히 보니 정아의 어머니가 분명하였다. 찍은지 얼마 되지 않는 모양으로 이미 중년을 넘어선 여인의 모습이었으나 그것이 명애(明愛)라는 것을 윤 사장은 단번에 알아본 것이었다.
(늙었구나. 명애도 늙었구나!)
윤 사장은 감히 가까이가지는 못하고 이렇게 속으로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네 방이로구나』
윤 사장은 감회가 깊은 듯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버지, 여기 누우세요. 이방은 제방이니까 누추하기는 하지만 조금도 사양하실 필요는 없어요』
정아가 누울 자리를 아랫목에 마련하고 아버지에게 권했다.
『오냐. 네가 기거하는 방이니 나도 한번 누어서 잠시라도 네 생활을 함께 누리고 싶구나. 사실은 그래서 일부러 들어온 것이다.」
윤 사장은 딸이 마련한 자리에 누어서 웃으며 정아와 정식을 대견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정아는 여기서 기거하지만 정식이는 숙소가 어디냐?』
『저는 여기서 멀어요. E동이니까 여기 한번 오려면 한시간 이상이나 걸리는 걸요.』
정식이가 아버지 머리말에 앉아서 대답했다.
『아버지, 시장하지 않으서요? 제가 무엇이든지 잡수실 것을 만들어 드릴가요?』
정아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네가 해주는 음식을 한번 먹어보고 싶다만 도무지 생각이 없구나. 차나 뜨겁게 한잔 끓여다구.』
정아가 차를 끓여와 마시는데 대문에 자동차소리가 나고 은실이와 서무과장과 숙직사원과 수위가 몰려들어왔다.
『사장님, 벼란간 웬일이십니까?』
서무과장이 들어오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서무과장이나 올 일이지. 무엇하려고 이렇게 여럿이 왔나?』
『사장님께서 졸도를 하셨다고 해서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할 것 같아서 우선 있는 대로 최대인원을 동원해 가지고 왔읍니다. 너무 요란스럽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서무과장은 당황하여 사과했다.
『아니오. 성의는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어쨌든 와주어 고맙소. 서무과장만 들어와서 여기 좀 앉으시오.』
다른 사람은 자동차가 있는 밖으로 나가고 서무과장만 윤 사장 앞에 들어와 앉았다.
『우리 회사 서무과장이시다. 인사들 드려라.』
윤 사장은 정아 남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누구신지…』
서무과장이 어리둥절해서 정아 남매를 바라보았다.
『허허허… 이 애가 내가 지금까지 목이 마르게 찾던 바로 그 처녀가 아니오?』
『네』
서무과장은 놀라서 정아를 바라보았다.
『이게 바로 내 딸이오.』
『네? 따님이세요?』
『그러구 이건 내 아들이오?』
『아드님이시라구요?』
서무과장은 정식을 바라보았다. 건장하고 씩씩한 청년이었다.
『내가 오늘 굳이 과장을 오라고 한 것은 부탁이 있어서 그런 거요』
윤 사장은 낮으나 힘있는 목소리로 잘라서 말했다.
『내가 만일 죽으면 동서무역회사의 후계자는 바로 이 애들이오. 그러니 그런 줄 알고 일처리를 해주오.』
『네. 알겠습니다. 허지만 사장님께서 돌아가시다니…』
『두고 보면 알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