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一節(삼일절) 50주년 獨立鬪士(독립투사) 探訪記(탐방기)] 70歲(세)의 崔天浩(최천호)(요셉) 翁(옹)
180센티 우람한 풍채
“三一節(삼일절)의 본뜻, 온 國民(국민)의 團結(단결) · 協調(협조)”
나뭇군으로 變裝(변당)해 압록강 넘기도
總督暗殺(총독암살) 企圖(기도)타 체포대 實刑(실형) 받고
1919년 기미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하여 3천만 온겨레가 자주독립을 외치며 총궐기한 이날, 금년이 어느듯 50주년이 되는 해다. 사라져가는 그날의 민족정신을 되찾고저 이날 기자는 어느 교우 독립투사를 방문하였다. 지금 서울 성동구 성수동1가 253번지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는 崔天浩(요셉) 옹은 70세라기엔 아직도 정정한 모습, 180㎝에 가까운 장신과 우람한 풍채가 투사로써의 지난날의 모습을 아직도 엿보이게 한다.
三 · 一절 50주년을 맞는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오래 살아 또다시 이날을 맞는 감회는 그저 슬픔밖엔 없소. 먼저간 동지들한테 면목도 없고. 두조각난 이나라가 통일될 때를 기다리나 참 괴롭고 슬프기만 하오.』
최 옹이 1900년 2월 20일 평북 의주 압록강변의 한 부농의 외아들로 태어난지 19년, 당시 최천호 청년은 천도교도인 한 학자 이윤각 선생에게 한문을 배우던 한 평범한 농촌 청년이었으나 이곳에도 독립운동의 물결은 밀려와 이윤각 선생을 지도자로 1백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3월 15일을 기해 일본헌병 분견소를 습격, 불살라 버렸다.
이 사건으로 50여명이 체포되고 최천호 청년은 40여일만에 피신했다가 결국 조국광복을 위해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나뭇군으로 변장, 압록강을 넘어 북만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吳東振 先生 지도하에 북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위한 군사자금 조달을 임무로 하는 廣州靑年團에 입단했다. 그후 최천호 청년은 의주 옥상면 주재소 습격 등에 참가, 용맹을 떨치고 2년후에는 새로운 임무를 띠고 洛陽講武堂(軍官學校)에서 교육을 받은후 23년에는 정식으로 上海임정 경무원으로 복무했다. 망명 7년만에 최천호 청년은 후일 東拓폭탄사건의 羅석주와 李化翼(현재 生存함)과 함께 상해 臨政 주석 金九 先生으로부터 朝鮮總督殺害의 命을 받았다. 이때 나석주는 먼저 조선으로 떠나고 이화익 최천호 두 청년은 별도로 떠나 北京의 어떤 여인숙에 머물다가 뒤따라 미행한 日本 영사관원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날이 바로 1926년 5월 25일이다. 신의주로 압송되어 2년간의 예심을 거쳐 28년 4월 실형선고를 받았으니 당시 東亞日報 1面에 「朝鮮總督謀殺犯 崔天浩 五年言渡」라고 대서특필로 보도하여 온겨레의 피를 솟구치게 한 것이 바로 이 事件이다. 옥고를 치르고 최 의사는 33년 출옥했으나 요시찰인으로 지목받아 조용하게 지나던중 조국의 광복을 맞이했다. 환희의 광복도 최 옹에게는 기쁘지가 않았으니 두 조각난 조국땅에 공산주의의 마수가 뻗쳐왔던 것이다. 드디어 46년 3월, 부인 최경옥(떼끌라) 여사와 두 남매를 데리고 자유대한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렇게 지난날을 회상하는 崔 옹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63년 3월 1일, 정부는 崔天浩 투사에게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했고 매월 2만원씩의 원호금을 지급하고 있다. 三·一절의 본뜻을 「온국민의 단결, 협동」이라고 말하며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최 옹은 지금도 조국의 통일만을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있다. (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