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3·1절을 당하면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우리 신학교가 벌컥 뒤집히던 기억이 어제인듯 새롭다. 그것이 벌써 50년전의 일. 그때 내 나이 17세-.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에 끝나고 1919(기미)년에는 불란서 「빠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는데,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하는 민족자결주의대로 나간다면 우리 한국도 독립될 것인즉, 우리가 일본 통치에 불만을 품고 독립을 외친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당시 일반의 통념이었다.
그래서 3월 1일 서울에서 폭발한 「만세운동」은 벌판에 타나가는 불처럼 방방곡곡에로 퍼져나갔다.
그무렵 기차간에서 어떤 청년이 앞에 앉은 역시 젊은 安學滿(누까) 신부를 보고서 『어찌 천주교회의 태도가 이처럼 소극적이냐?』고 분격하였다. 청년은 아마 열렬한 독립운동자였던 모양이다. 安 신부는 『당신네 들이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우리에게 하지 않고서 이제와서 이게 무슨 소리요? 미리 우리에게 연락을 하였던들 우리 천주교인들이 어디 피흘리기를 두려워할 사람들이요?…』 하고 반박하였다. 그 당시 기차간에서 이런 수작을 터놓고 하는 것도 여간 담대한 짓이 아니었다.
이상 安 신부의 말은 임기응변의 공박이었겠지만 당시 교회대로는 『천주의 것은 천주께, 체살의 것은 체살에게…』의 원리를 고수할 수 밖에 없었겠고 또 달리 될 형편이 못되었다.
1919년 한국천주교회의 통계표를 들추어 보자. 전국 13도에 불국인 신부 42명이요. 한국인 신부는 늙은이, 젊은이 모두 합하여 23명 뿐이었다.
그리고 서울 · 평양 · 대구 · 원산 · 전주 기타 읍내본당에는 즉 요지에는 불국인 신부들이 있었다. 이것은 민족차별의 견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불국인 신부들은 우리들 보다 학식도 많고 견문도 넓고 일반이 洋大人을 알아주던 시대요 일본인 관헌들도 洋大人만은 어려워 하던 터이므로 정책상 당연한 조처이었다.
사업으로는 전국을 통하여 작은 규모의 성서인쇄소 · 고아원 하나뿐, 병원도 교육기관도 없었다. 중학교는 물론 보통학교(정규의 국민학교) 하나도 갖지 못하였다.
신자는 전국 13도에 퍼져있는 젖먹이 어린 아기로부터 80노파까지 모두 합하여 8만8천5백41명에 불과하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천주교박해의 여파로 아직도 산골에 모여살고 있었다. 경기도에 「하우현」 「미리내」 「갓등이」, 강원도에 「풍수원」 「용소막」 같은 산골본당이 신자가 많이 살고있는 「큰 본당=교회」이었다. 지금도 그런 곳에 우뚝 서있는 고색 창연한 그러나 본격적 규모의 튼 성당 건물이 이것을 말하고 있다.
아직도 나의 기억에 새롭지만 그때 주일미사 참례하러 읍내 성당에 모이던 신자들은 거의 전부가 옷차림도 후줄구레한 갓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중 30대 이상의 남녀들은 자기들 친히 체험한 박해의 기억이 아직도 피부에 스며있던 신자들이다. 종교자유가 선도되었다 하지만, 동학란 전에는 신부들이 「수단」을 입고 시골 거리에 나다닐 수 없었다고 들었다. 그다음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와 전쟁을 하여 이기고 난 다음 보수적 세력이 결정적으로 물러난 후에야 전국적으로 완전한 종교자유를 누렸다 한다.
우리가 일본제정에서 해방된 것이 25년전이고 6·25 동란을 치룬 것이 20년전 - 그러니 지금 40대 이상 사람들은 일본제정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다. 만일 지금 자칫 잘못하여 또 일본제정이 들어올 위험이 있다면 얼마나 조심스럽고 불안스러울 것이냐.
한국에서 천주교가 박해당한 것을 회상하여보자. 고위 「상놈」들은 제사를 안드려도 내버려두고 잇다가 천주교신자들은 제사안드린다는 것을 「죄목」으로 삼아 박해아혔고, 동학란 당시에는 「제사」는 문제삼지 않고 西學이라는 「西」만을 트집잡아 몰아내려 하지 않았는가? 그런즉 1919년 당시 30대 이상의 신자들은 박해를 직접 · 간접체험한 갓쓴 사람들인지라 일본제정에게 천주교 박해의 무슨 구실을 만들어 줄 수 없었던 것. 즉 교회로서 독립운동을 펼칠 수 없었던 정황을 후세사람들은 마땅히 알아주어야 할 것이다.
尹亨重(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