刷新(쇄신)의 道程(도정) ① 司牧(사목)과 敎理敎育(교리교육)
政治(정치)질서도 초월적 권위 상실
下降(하강)하는 현대 人間(인간)정신
과학의 事物支配(사물지배) → 神(신)없는 世界(세계)
■ 과학 정신지배
『인간의 지능과 창조적 노력에 의해서 일어난 이 변혁들이 이제는 인간자체를 변혁시키게 되었다』(사목헌장 4)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생활에 미친 역할이 그와 같이 크지만 이 기술의 발전은 주로 현대자연과학에 그 혜택을 입고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뿐아니라 자연과학과기술과 공업화제도는 상호간 기능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의 눈에는 이 자연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두드러지게 큰 것이다. 자연과학과 기술공업은 현대인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서 과언이 아니리라. 어떤 사람은 지금 자연과학에 대한 신앙은 세계적 종교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현상을 시공 안에 있는 다른 현상의 실험으로 해결 지우려고 하는 자연과학이 사람의 정신을 지배한다면 자연적으로 사람은 신없는 세계, 피안과 무관한 세계상을 가지게 된다.
■ 집단의 민주화
『공업화된 사회형태는 점차로 확대되어 어떤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윤택케하는 동시에 수세기 동안 계속된 사회생활의 개념과 조건을 완전히 변질시키고 있다』(사목헌장 6) 기술공업세계에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을 인간의 작품으로 평가하며 따라서 어떤 사회집단이나 국가에 대한 자기의 처신도 이와 같은 견지에서 취하게 된다. 자연을 변형시킬 수 있다면 사회단체도 변형시킬 수 있다는 태도다. 과학의 영역 내에 자리잡게된 사회학은 사회를 이리저리 뜯어고칠 수 있는 기사로 등장한다. 정치의 형태나 국가의 형태가 사람에 의해서 형성되게 된 것이다. 환언하면 국가는 요새 와서 옛날의 타부(TABU)적 성격을 잃어버렸고 사람의 한 작품으로 알려졌다. 기술공업과 민주주의는 생산적 자유와 함께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또는 사회적 질서는 초월적 권위에서 즉 신의 은혜에서 근거된다는 생각은 이미 지나갔다. 사람들 자신들이 정치적 단체를 구성하고 그 형식을 마음대로 선정하며 필요하면 그것도 변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종교단체도 그 어떤 초월적 최고 권위에서 유래된다는 사실이 이제는 ____한 것이 아니고 점점사회의 어떤 단체와 유사하게 취급되게 된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도 현대인들은 신의 작용과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_____에 대한 사람의 관계가 전보다 많이 변했다. 세상 사물은 이제 사람으로 하여금 관상을 통하여 절대자인 신에게까지 상승하도록 촉진시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사람은 세상사물을 기술로써 지배하고자 한다.
사물의 관상을 통하여 절대자인 신에게 도달할 때는 사람의 정신이 사물을 통해서 위에로 상승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로 사물을 지배할 경우에는 지배자의 입장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다. 사도행전 17장 23절에 사도 바오로는 희랍사람들에게 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나는 이제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면서도 예배하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알게 하겠읍니다.』 희랍사람들은 철학으로 신을 찾았으나 바오로는 신학자로서 그 신을 알고 있었다. 희랍사람들이 추구하는 신학과 종교는 자연신학이며 자연종교였으나 바오로의 그것은 계시신학이며 계시종교였다. 그러나 희랍사람들은 신을 추구하고 알고자 했다. 즉 사물을 통하여 위에로 상승했다. 바로 그러기 때문에 바오로의 계시신학과 타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사물을 통하여 인간의 정신이 강하고 있는 현금에 있어서는 이러한 타협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정신이 이와 같이 신과 멀어진 원인 들은 이외에도 많겠으나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겸손되이 또한 마음깊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할 이에 대한 말씀을 사목헌장 19항에 찾아볼 수 있다. 『무신론이란 전체적으로 보아서 자체 안에 그 원인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가지 원인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 원인 중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반동, 어떤 지역에 있어서는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항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무신론 발생에 적지않는 책임을 신앙자들이 질수도 있다. 자신들의 신앙배양을 등한시하거나 교리를 잘못 설명하거나 종교생활 윤리생활면에서 결점을 드러냄으로써 하느님과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 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선교방법에 대한 일대반성이 필요하다. (계속)
이경우(칠곡 신동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