土着化(토착화) 摸索(모색)하는 修道會(수도회) ㊥
아세아 凡(범) 베네딕도 수도원 長上會(장상회) 參加記(참가기)
宗敎(종교) 영향, 태국땅 赤化(적화) 면해
平凡(평범) · 소박하던 T. 머턴 師(사) 강연후 急逝(급서)
西歐人(서구인)으로 힌두式(식) 싸리에 맨발의 수도자들 참가도
타일란드의 승려들에 관한 말이 났으니 좀더 써보고 싶다. 타일란드에서는 남자 스님은 모두 주황색 천으로 몸을 두르고 여승들은 백색으로 몸을 싼다. 순결을 보전한다는 뜻에서 남자 스님들은 여자들과는 악수는 커녕 옷깃도 스치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들이 무슨 물건을 남자 스님께 드릴려면 반드시 남자를 통해서 드리든지 혹은 물건을 땅에 놓으면 그제야 남자 스님이 집어든다. 너무 부자연스럽고 낡은 세기의 유물같은 것으로 느꼈지만 순결과 동정을 사랑하는 그들의 정신에는 존경이 갔다.
사실 불교가 타일란드에 끼친 영햔은 가톨릭이 구라파에 끼친 영향보다 더 큰 것 같다. 『성당을 짓는데 이렇게 시간과 돈과 공력을 들일 필요가 있나』하고 구라파에서 화려한 성당을 참배할 때 생각하였는데 「방콕」의 에메랄드 사원에서도 같은 의문이 났다.
타일란드의 주위가 모두 공산주의에 의해 적화되었는데 타일란드만은 무사하다. 열반을 이상으로 삼는 그들이기에 공산주의가 이론화한 물질적 지상 천국에 매력을 느낄 까닭이 없었으리라. 옆 길로 나간 것 같다. 토착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토론을 하였지만 앞으로 생각해야 할 과제로 여러가지 문제를 남겼을뿐 구체적인 해결책은 그리 쉽게 나지 않았다.
이번 회의에 서구인으로서 힌두교 승려들이 입는 「쌔프런」색의 「싸리」를 걸치고 맨발을 한 수도자 세 분이 참석했다. 두 분은 신부님, 한 분은 수녀님이었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조국인 독일, 불란서, 영국에서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하다가 인도에 가서 힌두교 승려들의 생활 양식을 따라 수도생활을 하는 분들이었다.
세 분이 모두 연사였고 모두 뼈 있는 말씀을 하셨다. 곡 그렇게 옷에서까지 토착화를 기대해야 될까마는 그들의 용기와 열성에는 탄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연사들 중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두 분이 계신다. 한 분은 관상적 수도생활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생활을 하여 몸은 비록 세속을 떠나 깊숙이 수도원에 파묻혀 있으면서 침묵, 기도, 고행, 노동을 통하여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여 교회의 표지가 되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토마스 머턴 신부님이시고 다른 한 분은 세상에 직접 파고들어가 사람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이 복음을 전하는 활동적인 사도 사두 이티아비라이시다. 이번 회의와 결부시켜 이 두분의 「프로필」을 옳기고 싶다.
토마스 머턴 신부님은 그의 자서선 「七重山」(THE SEVEN STORY MOUNTAIN)을 통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진 분이다. 그의 저서 중 「명상의 씨」를 비롯하여 3권의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었으므로 이미 그 분에 대해서 아시는 분도 적지 않을 줄 안다. 우리 가톨릭이 자랑으로 삼는 이 위대한 시인이며, 작자이며, 명상가며, 수도자인 머턴 신부님은 회의가 시작된지 이틀째 되는 날 당신이 당당한 강론을 마치고 약 3시간 뒤 천주께로 가셨다. 아들이 아버지를 찾다가 만난 것이다. 회의에서 사용한 말은 영어와 불어였는데 머턴 신부님은 이 두가지 말에 다 능통하였으므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큰 역할을 하셨다. 신부님은 건장한 체구를 가지신 분이었다. 그의 외모가 너무나 평범하여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분을 토마스 머턴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왜관의 오도 하아스 아빠스님이 처음 그 분과 상면하였을 때의 말이 재미있다.
『정말 당신이 토마스 머턴 신부님입니까? 제가 생각했던 분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할 수 없어요. 제가 토마스 머턴인걸 어떻게 합니까?』
천상적 관상 속에 사는 접근할 수 없는 수도자인줄 알았는데 인간적인 구수한 맛과 유모어가 풍부하여 얼마나 부드럽고 접근하기가 쉬웠는지 그 천부적인 글 재주와 상상력은 어디에 가고 그토록 소박하기만 하셨는지. 10일 11시경에 「맑스주의자와 수도생활의 앞길」이라는 제목으로 강론을 하셨다.
신부님은 지금과 미래에 겪을 수도원의 현대적인 문제들을 심각하게 말씀하시면서 그래도 『공산주의 치하에서라도 수도원이 존속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시고는 『세상 마칠 때가지 나 너희와 같이 있겠노라. 두려워 말라』고 하신 천주님의 말씀을 최후의 답으로 삼으셨다. 이 강연이 최후의 강연이 될줄은 하느님 외엔 아무도 몰랐다. 강론을 마치고 합동미사를 드리고 세상에서의 최후의 점심을 우리과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점심식사 후부터 4시 분과회의 전까지 우리는 모두 자유시간을 가졌었다.
그런데 머턴 신부님 바로 윗층에서 쉬시던 분이 오후 3시경에 이상한 소리를 들었지만 그것이 머턴 신부님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시체는 그후 약 한 시간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그룹토의」가 4시에 있었는데 그때까지 신부님이 나오시지 않아 모시러 갔다가 발견한 것이다.
선풍기가 넘어지면서 전류가 통한 것이 원인이었다.
사람들이 들어가서 신부님 몸 위를 가로질러 있는 대형 선풍기를 치우려고 하는 순간 강한 전류가 흐르고 있음을 느껴 즉시 소켙을 뺐다고 한다. 이미 감전되어 돌아가신지 한시간이 넘었지만 혹시나 하는 미련에서 의사를 찾았다. 마침 필자의 장상 에델트루트 원장수녀님이 의사이시므로 달려갔지만 그땐 벌써 의사로서이 도움은 필요치 않았다.
그날은 「그룹토의」를 중단하고 세상을 떠난 영혼을 위하여 기도를 올렸다.
『사람은 갈대다』라는 말도 뇌리를 스쳤다.
『생각하는 갈대』 우리의 토마스 머턴, 그렇게 폭넓은 생각을 하신분, 그렇게 싶은 명상을 하신 분이 아무것도 아닌 전기에 의해 가시다니…. 시체는 냉동을 시켜 미국으로 보냈다. 지금은 「제쎄마니」의 흙이 되어가고 있겠지….
「七重山」을 보면 그가 천주를 찾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일생은 천주를 찾는 과정이었다. 성 베네딕또께서 『수도원에서 입원하려는 자가 있거든 먼저 천주를 찾는지 살펴보아라』고 하셨듯이 수도자들은 죽을때까지 시종 여일 천주를 찾지만 세상에서는 그분을 만나지 못한다. 머턴 신부님도 천주를 찾아 「트라피스트」까지 갔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천주를 찾으며 체험한 것을 자기의 전용물로 하지 않고 그의 천부적인 글재주를 써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방콕」에 오셨던 것도 그때문이었다. 이제 오랜 기다림 속에 찾던 분을 만났으니 일곱겹의 산고개를 넘던 노고도 끝났구나….
타일란드는 겨우 0.5%의 가톨릭신자를 가진 어린 전교지방이다. 전교지방엔 활동적인 회도 필요하지만 교회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관상적 수도원도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이번 회의의 목적 중의 하나는 아시아에 수도원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전지 토마스 머턴을 타일란드에서 걷우어가신 천주님의 섭리에 대해서도 좀 이해가 간다. 그분이 죽음이 씨가 되어 기운찬 나무로 자랄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김 베다(대구 성베네딕또수도회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