筆者가 入校以來 노둔한 머리에도 우리 天主敎는 近代化에 앞서 是正되어야 할 이모저모가 느껴진다. 이번은 問題를 局限시켜 司祭의 本堂運營이 信者에게 어찌 反映되는가를 들고 「蠻勇의 苦言」을 提示한다.
우리 天主敎의 草創期에는 外國神父들의 功勞가 참으로 컸음은 勿論이다. 殉敎, 그 뒤의 傳敎와 아울러 海外에서 財政的 援助를 이끌어들여 敎會發展의 基礎를 마련한 그 功勞야말로 不滅의 記錄이 될 것이다. 그러나 疫病과 「마마」가 橫行하고 文盲이 우글거리는 前日의 韓國은 未開社會로 看做되었을지 모른다. 이러한 評價는 西歐문헌에서 얼마라도 나오니 말이다. 따라서 信者는 神父를 「唯命唯從」式으로 至誠으로 尊崇했고, 神父는 信者에게 敎父와 같은 威嚴을 가지고 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援助金으로 運營되는 敎會의 會計面을 信者로서 어찌 云韻할 수 있었으랴. 勿論 오늘날 모든 面이 改新되었다고 보지만, 어딘가 이러한 面이 傳統과도 같이 潜在되고 있어, 아직도 根治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선 一例로서 筆者가 入校뒤, 年少한 司祭가 年老한 信者에게 「반말」을 使用하는 것을 보고 大驚失色한 일이 있다. 이것은 韓國의 固有한 美風에 違背되는 것인데, 곧 前日 外國神父의 尊嚴性 維持에서 使用된 言辭와 자세의 繼承이 아닌가 한다. 近者 入敎한 知己가 「냉담」으로 기울어감을 보고 물으니 『神父가 내게 반말을 하다니』라고 吐露함을 들었다. 敬語法이란 禮儀表示의 基準임을 强調하는 바이다. 마음에 本堂에 따라 司祭가 敎會運營의 會計面에 대해서 信者가 규視함을 忌避하는 傾向이 相當히 짙다고 하겠다. 이것도 前日 援助로 運營되던 時代의 잔재라고 하겠는데 敎務金으로 獨立運營되는 本堂에 限해서는 現代社會의 倫理와도 같이 最小限 會長團에게는 그 明細를 公開하든 會長團에게 會計를 一任함이 當然하다고 하겠다. 一般社會의 어느 團體이든 幹事와 監査가 있음은 常識問題인 것이다.
어느 本堂에선가 會計는 一年一次 主敎님이 檢査하는 것이니 信者의 介入이 必要없다는 主張을 한 司祭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 敢히 一言한다. 『主敎님은 計理士가 아니다』라고. 會計面의 明細를 公開해서 아니될 理由가 무엇이며 그것으로 信者의 心中에 적지않은 動搖를 불부침을 볼 때 決코 天主님의 뜻에 合當한 處事라고는 解釋될 수 없다고 斷定한다. 前日에 援助金으로 運營되던 時代의 잔재가 20世紀 後半期에 아직도 持續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李崇寧(文博 · 서울大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