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話(대화)를 위한「시리즈」] 慈悲(자비)에 관하여 ①
佛敎學(불교학)은 人間學(인간학)
발행일1968-12-15 [제648호, 2면]
나는 이글을 어떤 종교와 어떤 종교사이의 敎理의 優越을 논하는 趣旨에서 쓰지 않는다. 나는 어느 종교에 속한다고 하는 것이 인간 자체의 중대한 문제를, 그 赤裸裸한 인간의 자리에서 思索하고 達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된다면 그러한 태도는 인간자체에 대해서만 反逆하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자체에 대해서도 反逆하는 일이 된다는 자각하에서 이 글을 쓴다. 나는 물론 불교학을 專功하는 학자이기 때문에 나의 專功에 관한한 내 發言의 모든 책임을 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神學者가 아니기 때문에 그 분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있는 발언도 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그런데 불교학은 신학과 같이 「도그마틱」한 학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人間學인 까닭에 이글에 표명된 여러가지 思想은 모름지기 그 독자들도 神學者의 「도그마틱」한 입장에서가 아니라 적라라한 인간적인 입장에서 들려지고 생각되고 응답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앞으로 몇회에 걸쳐 나는 불교에 있어서의 慈悲에 관한 이야기를 가능한한 상세하게 말해보고자 한다. 물론 週刊紙라는 제약하에서 피할 수 없는 限界를 의식하지만 편집자의 强請에 못이겨 붓을 든다.
①「慈悲」란 말의 뜻
「慈」와 「悲」와는 본래 原語자체가 다른 말이다. 慈의 「파알리」 原語는 METTA며 「산스크릿트」 原語는 MAITRI(또는 MAITRA)이다. 이 두말은 語源的으로 따지자면 「벗」 「親한 사람」을 의미하는 MITRA라는 말의 派生語로서 眞實한 友情, 순수한 親愛의 念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悲」란 「파알리」語 및 「산스크릿트」 語가 다 한결같이 KARUNA인데 일반적으로 이 말은 「哀련」 「同情」 「부드러움」 「인정있음」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엄격히 따지는 訓話學者들은 이 「慈」와 「悲」를 구별하여 설명하는 경우가 옛날부터 있어왔다.
一例를 들면 「慈」(METTA)란 「利益과 安樂을 가져다주려고 바라는 일」을 말한다하고, 「悲」(KARUNA)란 「不利益과 苦痛을 除去하려고 원하는 일」이라고 해석하는 初期경전이 있다. 이와 비슷한 해석을 乘佛敎의 哲學者 龍樹가 지었다고 하는 大智度論에도 다음과 같이 들어 있다.
『慈란 衆生을 愛念하는 일을 말하며, 항상 安隱과 樂事를 求해 그것으로써 衆生을 요약한다. 悲란 衆生을 민념하는 일을 말하며 좋지 않은 生活條件속에 빠져 갖가지 身體上 苦痛과 精神上 苦痛을 받고 있는 것을 민념함을 말한다.』 『大慈란 一切의 衆生에 樂을 주고, 大悲란 一切의 衆生을 위해 苦를 없앰을 말한다. 大慈는 喜樂의 因緣을 衆生에게 주고, 大悲는 雜苦의 因緣을 衆生에게 준다.』 그러나 이와 反對되는 해석도 다른 大乘經典에는 나타나고 있는데 例를들면 大般열반경에는 부처님의 大慈를 大悲와 구별하여 『모든 衆生을 위해 無利益을 除去하는 일, 이를 大慈라 하고, 또 衆生에게 無量한 利藥을 주려고 원하는 일, 이를 大悲라고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이와 약간 다른 해석도 나타나고 있는데 「산스크릿트」 本의 보살지지경에는 『뭇 衆生이 오로지 苦痛의 뭉치를 몸에 받고 있음을 緣起의 道理에 의해 觀하고 있을 때에는 悲가 생기고, 모든 衆生이 모두 이 苦痛의 뭉치에서 나에 의해 벗어나게끔 되어야 한다고 觀하고 있을 때에는 慈가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差別的인 해석은 그러나 一般的인 해석이 아니라, 오히려 특수한 訓話學的 해석구실 밖에는 못한다.
일반적으로는 이 두 낱말이 거의 구별없이 하나의 말 「慈悲」로서 쓰여져 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중국에 와서 이 말은 하나의 合成語로 通用되었고 原語의 번역도 특별히 그 原義를 밝히려고는 하지 않는 경향이 농후해졌던 것이다.
「慈悲」의 의미는 오히려 이러한 語義學的方式으로 이해할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經典에 나타난 說法의 內容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다음 회부터 經典에 실린 說法의 내용을 들어 그 뜻을 밝히기로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