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6년 12월 9일밤, 자정에 가까울 때 김대건 소년(15세)은 중국인 유파치피고 신부와 두 동창생 최 프란치스꼬와 최 토마 그리고 두 안내자, 이렇게 6명이 목적지인 「마까오」를 향하여 서울을 떠났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 사상 처음인 본방인 성직자 양성의 첫길이었다. 그들은 정부에서 발행한 증명서나 지금 우리가 소지하고 있는 여권도 없이 무작정 고국을 탈출해야만 했다.
그들은 1837년 6월 6일, 서울을 떠난지 일곱달 만에 목적지인 「마까오」에 도착하였다. 그당시 「마까오」에는 동양전교사업의 중책을 띤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 직속 경리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며칠을 쉬고난 세 신학생은 「빠리」외방전교회 깔레리 신부와 메플레쉬 신부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두분 교수 신부는 1839년까지 「마까오」에서 세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깔레리 신부는 이딸리아의 「뚜린」에서 출생한 분으로서 「마까오」 의 「빠리」외방전교회 지부에 있었는데 한국의 전교신부로 임명 받았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대로 「마까오」 「빠리」 외방전교회 지부에 있다가 1842년 「빠리」외방전교회의 사제직을 내놓았다.
(註 필자가 직접 현재 「마까오」에 있는 예수회 떼익세이라 신부에게 연락하여 조사하였음) 그런데 김구정 저, 성용 김대건 전 1961년도판 120페이지 11행에 『깔레리 신부는 1839년 겨울에 사천(四川) 주교로 승품될 때까지 조선학생의 책임자로써의 직무를 다하였다』고 기록되었기에 나의 조사결과와 상이한 점이 있음을 알려둔다. 「마까오」의 떼익세이라 신부의 조사한 회답에 의하면 『데플레쉬 신부가 1844년에 「사천」(四川) 주교로 승품, 1856년에 「사천」 교황대사로 임명 1883년에 「글라우디아노폴리스」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1887년 11월 7일에 프랑스의 성라파엘 의료원에서 74세로 별세하였다.
■ 첫 마닐라 訪問
세 신학생들이 공부를 시작한지 3개월도 못되어 「마까오」에 민란이 일어나 부득이 수업을 중지하고 다른 곳을 찾아서 공부를 계속 해야만 했다. 그당시 가톨릭이 성하고 또 신학교가 있었던 곳은 필리핀의 「마닐라」였다. 그래서 두 분의 교수신부는 세 신학생을 데리고 같은해 1837년 8월에 「마닐라」로 피난해왔다.
「마닐라」의 어디로 와서 공부를 계속했을까? 이것이 필자가 틈틈이 연구하여 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도민고회 신부이며 현재 성토마스대학교의 사학과 담당교수인 빠블로 페르난델 신부 말에 의하면 『1839년 4월에 제2차 피난당시 「롤롬보이」(LOLO,BOY) 마을에 있는 도민고회 별장을 빌려서 공부를 했다는 사실을 보면, 그당시 프랑스 신부들이 도민고회 신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당시 도민고회에서 경영하던 대학이 둘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성토마스대학교이며(1611년에 개교) 또 하나는 레뜨란대학(1621년에 개교)이었고, 성도민고회 대성당과 도민고회 수도원과 기숙사가 현재 「마닐라」의 대성당을 중심으로 둘러싼 「인트라무로스」(城內都市)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다시말하면 1837년경에 「인트라무로스」성 안에는 도민고회에서 경영한 성토마스대학교 레뜨란대학이 있었고, 예수회에서 경영한 성이냐시오대학(1595년 창설) 그리고 성아우구스띠노회 대성당(1599년 준공) 등이 있었지만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는 오직 성토마스대학교에만 부설되었을 뿐이고 예수회 경잉인 성이냐시오대학은 주로 스페인 귀족들의 자녀들만 교육시켰으며, 레뜨란대학은 스페인이 고아들을 위해서 특별히 교육을 실시했다고 한다. 필자는 페르난델 교수신부의 안내로 130년전 김대건 신부가 피난와서 공부를 했으리라는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김대건 신부가 배를 타고 「마닐라」에 들어왔기 때문에 「빠따안」주와 「까비떼」주로 좁게 오물아진 「마닐라」 항으로 들어왔다. 「마닐라」항의 문이라고 불리우던 「고리기도」 섬(제2차대전때 이곳에서 필리핀 군인들이 일본군을 대항하여 최후까지 싸우던 곳이다)을 옆으로 지나서 「인트라무로스」 성곽 옆을 흐르는 「파식」강으로 배를 저었다 지금 현재는 파식강에는 이쪽 「인트라무로스」를 연결하는 교량이 「록싸스」교량, 「호네스」교량, 「궤손」교량, 「이얄라」교량이 있지마니 1837년경에는 목조로된 「존손」교량(현 궤손교량) 한개만 있었다. 또한 「인뜨라무로스」쪽의 부두는 스페인 해군들만이 출입하는 항만이었으며 일반 선박은 건너편 부두를 사용하고 정박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일반 선박을 위한 부두는 「궤손」교량 근처에 있었으며, 김대건과 두 신학생, 두불란서 신부도 이곳에 배를 정박하고 「궤손」 나무다리를 건너서 「인뜨라무로스」 성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계속)
成應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