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藝時評(문예시평)] 風景(풍경)과 故郷(고향)의 意味(의미)
구원없는 暗秘(암비)속에 우는 人間像(인간상)
具常(구상)의「風景(풍경)」…苦痛(고통)속에 신앙의 분투 그려
가톨릭 文學(문학)범주 形成(형성)할 作品(작품)없고
參與(참여) 以前(이전)에 個人(개인)의 自我完成(자아완성)을…金義貞(금의정)의「故鄉(고향)」
散文文學(산문문학)의 本色(본색)낸「求道(求道)」를 主題(주제)
68년의 가톨릭문학을 돌아보아 달라는 편집자의 청탁이었으나 그것이 퍽 어려운 일이었다. 가톨릭 신자인 작가와 시인이 이땅에 여러분 있지만 그들이 일관하여 가톨릭문학이라는 범주를 형성할만한 작품 활동을 해온 것이 아니다. 또한 문학은 그것이 순수한 일반문학이되 기톨릭문학일 수 있고 가톨릭문학이되 일반문학일 수 있는 포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가톨릭의 세계관을 짙은 밀도로 작품내용 속에 담는, 거의 본격적인 가톨릭문학인이 있기는 하다. 시에서 구상(具常)씨, 소설에서 김의정(金義貞)씨가 그런 분이다. 이 두분의 근작(近作)을 살펴보는 것은 이 세모(歲모) 때에 한국가톨릭문학의 원형질을 캐어보는 시도의 일단이 될 것 같다.
「월간문학(月刊文學)」 11월호에 구상씨의 시 「풍경(風景)」이 있다. 이 「풍경」은 자연 속의 서정적인 한 폭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도시가 대양(大洋)처럼 넘실거리고 그 물살 위에는 군함공장과 선상의 「아파트」와 자질구레한 판자의 쪽배들이 떠서 역시 흔들리고 있는 것이 창밖으로 내다보인다. 그뿐 아니라 창 밖에선 검은 큰 나비들이 하늘에 떠다닌다.
한편 이 풍경들을 내다보고 있는 창속에서는 밤에 가득찰 만큼 큰 황금빛 해바라기의 양탄자위에서 발가벗은 사내가 무릎을 꿇고서 창밖의 나비들을 붙잡아 먹으려는 동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의 끝 연이 이렇게 되어 있다.
나의 심상(心像)은 암비(暗秘) 속에서
구원(救援)도 없는 광명을 향해
아름답게 울고 있다.
이 방 속의 발가벗은 사내가 곧 시인 구상이다. 그는 가식 없는 자연의 사람이다. 이 「자연의 사람」이라는 데에 그의 종교와 신앙의 실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생경하고 살벌한 현대의 도시 상황마저 자연으로 익혀서 보고자 한다.
해괴하기도 한 군함과 비행기들은 손가락으로 집어서 먹어 버리려고 입까지 딱딱 벌리는 발가벗은 사내. 그는 불타는 소망의 해바라기 위에 무릎을 꿇고 미쳐나지만, 그러나 그의 영혼은 구원이 없는 암비 속에서 아름답게 울고 있는 것이다.
왜 그에게 구원이 없을까. 그러나 그 성취되지 않은 구원의 고통 속에 그의 신앙의 분투가 있고 우주를 잡아 안으려는 씨름이 있는 것이다. 근래의 그의 연작시(連作詩) 「밭」에서 보면 이 시인은 담배 밭이 산허리를 타고 앉아 달리고, 참외 넝쿨의 벋어가는 줄달음으로써 밭이 강물을 앞질러가고, 그리고 누워서 보는 밭의 자세에서 하늘은 참으로 길고 넓다는 흥분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처럼 자연의 거대한 생명에 얼크러져 사랑하고 열광하는 그의 시심 이야말로 곧 그의 종교요, 신앙이다. 다만 그가 어떻게 창밖의 살풍경을 잡아먹어 버릴수 있을지, 즉 이 사회상황의 불순물들을 현실적으로 제거해 버리는 데에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인지, 이 문제는 그의 시와 신앙의 과제로 남는 것이다.
장편 「인간의 길」 「목소리」에 이어서 계속 가톨릭을 주제로 한 소설을 발표하는 김의정씨는 「현대문학(現代文學)」 12월호에서 단편 「고향(故鄕)」을 발표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역시 가톨릭의 윤바오로 신부. 이 작품의 주제의식은 산문문학의 본색에 다가가서 구도(求道)의 자세 문제에 있어서 직선적인 논의를 방법으로 택하고 있다.
「청소년을 위한 선도사업」 「장학회」 「토론회」 「독서회」…등 타인들을 위한 사업에만 열중하는 윤 신부는 옛날 신학교 시절의 스승인 박안드레아 신부로부터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라』는 훈계를 받는다.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은 본능적인 이기심을 키우라는 뜻이 아니고 조용히 자기 자신을 만나보는 시간을 갖고, 자신을 객관화하여 그 역량과 충실성의 문제를 검토하여 자신을 보다 잘 가꾸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과연 윤 신부는 자신이 거처하는 방풍경을 새삼 돌아볼 때 거기에는 자기충실을 기할 수 있는 안정된 공기가 있지를 못했다. 그때 그는 고향인 꺽새마을의 소꼽동무 옥순이의 방문을 맞이한다. 그러나 윤 신부는 냉정히 잡아 뗀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전 꺽새마을 옥순이라는 이름도 전연 기억하질 못합니다』 선술집 주모의 사생아인 윤 신부는 자기의 그 치부같은 근원을 증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윤 신부는 자기의 본색을 정직하게 감당하고, 또 사랑하여 용납하지 않고서는 마음에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남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들도 진실될 수가 없게 되는 것을 통절히 느끼게 된다. 그는 박 신부를 찾아가 평복을 벌어 입고 그 비린내 나는 부두가 고향집골목에 찾아간다. 지금은 집도 어머니도 남아있지 않은 고향에서 윤 신부는 입석처럼 움직일 줄을 모르며 서있는 슬픔, 그것은 비로소 남을 위해서가 아니고 자신을 위해서 우는 울음이었다. 그리고 그 홀로만의 울음을 통하여 인간은 살갗에 굳어진 때를 씻을 수가 있었음을 독자로 하여금 알게 한다. 요즈음 개인의 사회참여문제가 부단히 논의되고 있다. 현대의 양식(良識)은 상황의식과 역사의식 수반을 필요로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참여에 앞서서 개인의 자기완성이 홀로만의 밀실에서 영혼의 목욕과 수련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 개인의 완성을 위하여 종교는 최적의 집이어야 한다. 소설 「고향」은 대체로 너무 느슨했던 김의정씨의 작풍에 새삼 긴장과 「드라마」를 이룩했고, 그 주제에도 새로운 「리얼리티」가 있어서 반가운 작품이었다. 이렇게 살펴본 시 「풍경」과 소설 「고향」에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 가톨릭문학의 착실한 한 단면과 그 과제까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새해에는 이 계열의 문학적 능력이 더욱 한국문단에 영향하는 바 커서, 이 누리의 역사에 구원과 광명이 크게 더해지도록 감투해야 할 것이다.
具仲書(評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