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끝) <第二話(제2화)> 榮光(영광)의 敗北(패북) ㉗
발행일1968-12-15 [제648호, 4면]
윤 사장은 정식과 정아가 굳이 우겨서 S병원에 입원 했다. 종합 진찰을 받은 결과 그는 암이 만기에 이르러 이제 기름이 마른 등잔불이 꺼지듯이 종말이 박두한 것을 알았다.
『아버지, 안심하세요. 치료를 잘하면 나을 수 있다고 의사가 그랬어요』
정아가 환자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위하여 거짓말을 하였다.
『아니다. 참말로 그런 말을 했다며는 아마 환자나 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윤 사장은 병상에 누어서 쓸쓸히 웃었다. 광대뼈가 들어나고 주름이 깊이 박힌 초췌한 얼굴이었다.
『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병이란 환자가 마음먹기에 달린 거래요. 용기와 희망만 잃지 않으면 어떤 병이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거래요』
『그랬으면 나도 좋겠다. 그렇지만 내 병은 다르다. 정아야 내가 어째서 귀국을 했는지 아느냐? 서양의사 말이 앞으로 목숨이 반년을 넘기기 힘들테니 그동안에 미진한 일이나 다하라고 마지막 선언을 해서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벼란간 떠나온 것이다. 그래서 귀국해 가지고는 너를 찾느라고 온갖 애를 다 쓴 것이다. 그런데 너를 이렇게 찾아냈고 뜻밖에 정식이까지 찾아서 내 사업의 후계자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 나는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다. 나 같은 죄인에게는 너무도 지나치게 행복스러운 최후가 아니겠느냐.』
『아버지!』
정아는 가슴에 놓인 윤 사장의 야윈 손을 잡으며 울음이 복바쳤다. 뒤늦게 찾은 아버지에 대하여 정아는 막혔던 보가 터지듯이 한꺼번에 애틋한 정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 아버지를 찾았을 때 마음껏 기뻐할 겨를도 없이 또 영원한 이별이 앞에 가로 놓인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오실거에요. 제가 자세한 사정을 연락했으니까 곧 서울로 오실거에요.』
《머라구? 어머니가 온다구?』
윤 사장은 깜짝 놀라서 눈을 뜨고 정아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 싶으셨지요? 그러구도 차마 말씀도 못하셨지요? 저는 아버지의 심정을 잘 알고 있어요. 어머니는 깔끔하시고 야무진 성격이시지만 이번에는 꼭 서울로 달려 오실거에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계시거든요. 어머니는 한평생을 오직 아버지의 환영을 안고 살아오신 분이에요.』
정아는 복바치는 오열을 억누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머니가 와 준다면 나에게는 너무도 염치없는 일이지. 사실 내 마음대로 하면 그동안 벌써 목포로 달려 내려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알아요. 말씀안하셔도 아버지의 심정은 제가 잘 알아요. 그렇지만 인제는 모두가 지난일이니 너무 마음상하지 마시고 잊어버리세요』
윤 사장은 흥분하고 기쁜 빛이 완연하였다. 그는 속으로 얼마나 명애를 만나고 싶었던가, 만나서 죽기 전에 지난 일을 모두 사과하고 싶었던가. 그러나 차마 그를 자기가 먼저 만나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구 아버지』
『왜 그러느냐?』
『영세를 하셔야 겠어요. 사실은 벌써 신부님에게 부탁을 드려놓았어요.』
『영세라니?』
『영세를 받고 천주교신자가 되시는 거에요』
『나같은 죄인도 그렇게 할 수가 있겠느냐?』
『사람 가운데 죄인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는 거에요. 오히려 영세를 하시면 그동안 이 세상에서 지은 죄가 전부 씻어지는 거지요』
『나같이 용서 받을지 못할 죄인도 그 죄가 모두 씻어진단 말이냐?』
『그렇구 말구요. 천주께서는 무한히 인자하시니까 뉘우치기만 하면 어떠한 큰 죄라도 전부 사함을 받는 거에요』
윤 사장은 정아가 청해온 신부님에게 영세와 종부를 한꺼번에 받았다.
『신부님 저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배반한 큰 죄인입니다. 저 같은 나쁜 놈도 천주께서 용납을 하시겠읍니까?』
의식이 끝난 후에 윤 사장은 신부에게 말하였다. 눈에 눈물이 가득하였다.
『누구든지 영세를 하는 순간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지은 죄는 모두가 깨끗이 씻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세 후에 지은 죄도 뉘우치고 고백만하면 모두 용서해주십니다.』
신부는 또박또박 잘라서 힘있게 말하였다.
『천주님은 참으로 인자하신 분이시로군요』
윤 사장은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주께 의지하지 않고는 무엇하나 착하고 옳은 일을 할 수없는 것입니다』
윤 사장의 병세는 갑자기 기울어져서 입원한지 사흘되던 날은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정아는 아버지의 병상머리에 붙어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기회를 얻지 못했던 효도를 한꺼번에 하려는 것 같았다. 정식이도 아버지대신 회사에 나가 서무과장과 지나다가 병원으로 달려왔다. 윤 사장이 입원한지 엿새째 되는 날 저녁때이었다. 목포에서 정아 어머니가 올라왔다.
『어머니!』
『어머니!』
정아가 어머니의 손을 덥썩 잡았다.
『네 편지는 받았다. 그래 병세가 좀 어떠시냐?』
『의사 말이 벌써 어제부터 오늘밤 넘기기가 힘들거라고 그러는데 아직 살아는 계세요』
『어디 들어가보자』
어머니는 싸늘한 손을 가볍게 떨었다. 윤 사장은 잠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옛 모습을 찾아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여보!』
어머니는 조용히 윤 사장을 흔들었다.
처음에는 잠잠하다가 몇번 흔들었을 때 윤 사장은 눈을 떴다.
『나에요. 명애가 왔어요』
어머니는 목멘 소리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명애, 잘못했어. 용서해주오. 나는… 나는… 결국 모든 일에 실패하고 지고 말았오.』
『아니어요. 지기를 잘했지요. 이제 당신은 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영광으로 들어가시는 거에요』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