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話(대화)를 위한 「시리즈」] 慈悲(자비)에 관하여 ⑧
人間完成(인간완성)의 要諦(요체)
慈悲(자비) 眞理(진리)에 引導(인도) · 關鍵(관건)은 言行一致(언행일치)
深淵(심연)의 바다 · 끝없는 地平線(지평선) 같아
발행일1969-03-09 [제659호, 2면]
광하기가 大虛空과 같아 私가 없으며 灣하기가 巨海와같아 至公(지극히 공번되다는 뜻)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公平無私」라는 말이 이글 속에 보다 생생한 의미를 가진채 포함되어 있음을 留意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인플레」가 된 公平無私라는 말의 본뜻이 망각되고 지혜롭고 자비로울 수 있단 말일까? 元曉는 계속하여 그 마음이 巨海와 같이 지극히 公平(유니버살)한 까닭에 動과 靜이 자유자재하되 모순이 없으며 또 그 다음에는 私가 없는 까닭에 染과 淨, 더럽다, 깨끗하다는 偏執이 없는 것이라고 하고있다.
필자의 말을 부치자, 지혜로운 마음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라고만 속단해도 안되고 또 그 마음은 언제나 活動的인 마음이기만 하다고 생각해도 안되는 것이다. 그마음은 靜中動의 마음이요 靜中動의 마음이어야 하는 것이다. 또 자비로운 마음은 세상의 깨끗하고 티없는 사람만을 받아드리고 더러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마음은 私가 너무나 득실거리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참말로 자비로운 마음은 私가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나는 天堂(眞) 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너는 地獄(俗) 갈 운명밖에 못가졌다는 따위의 편협한 心思를 나타낼 理가 없다. 저것은 眞이다. 이것은 俗이다 하는 分別心은 어리석은 마음에는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것은 확실히 어느시기까지 肯定性을 띤다.
그러나 우리는 곧 그 肯定에 限界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眞이라고 하고 그것을 客體化시켰을때 이미 그것은 眞이 아니라 僞가 되고마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眞의 世界는 思辨의 길이 끊긴 저편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眞」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것을 向해 가는 凡夫의 입장에서 보면 「眞」은 굉장히 먼 거리에 아득히 놓인 他處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眞」은 나 바깥의 어느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나안의 가장 깊은 마음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깊다고 하거나 멀다고 하거나 그것은 다 凡夫들의 表現이다. 멀다고 보는 자는 그 먼곳 그 높은 곳을 바라다 보며 합장하고 엎드려 그마음을 지혜롭고 자비롭게 하고저 할 것이다. 거기에 感應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먼곳 그높은 곳을 바라보는 마음은 同時에 그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 深化되고 있는 마음이 아니라면 거짓말이 된다. 지혜롭고 자비로운 마음은 동시에 깊은 마음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元曉는 또한 그 글에서 우리에게 중대한 示唆를 해주었다. 凡夫의 지혜와 자비는 覺者의 그것을 닮았을뿐, 그것 自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凡夫는 온전한 지혜와 자비의 그림자(影)와 소리(聲)를 우리 內心에서와 더불어 外界에서 들어 그 훈습을 받아 그 모범을 따르며 精進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야할 最終目標는 그 그림자나 反響 그것이 아니라 그따위 觀念과 形象을 초월한 곳, 크다고 할 수도 적다고 할 수도 없는 그 마음,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그 마음, 모든 理致가 다 거기에 歸一하는 大道理, 모든 특수한 存在樣式이다. 하나의 普遍的 調和를 이루게 되는 그 마음이라는 것이다.
우리 各自에게 주어진 이 마음의 門을 여는 것은 慈悲의 열매를 가꾸는 捷徑인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이 독자 諸位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共鳴을 불러 일으켰다면 그것으로 보람을 느낄 것이다. 그 보람 속에 나와 너가 壁을 헐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