刷新(쇄신)의 道程(도정) ② 布敎(포교)와 敎理敎育(교리교육)
原罪(원죄)이후도 人間使命(인간사명)은 동일
「올바로 해석된 교리」의 전수로
聖書上(성서상)의 人間(인간) 中心的(중심적) 세계관 具現(구현)
『무신론을 시정하는 길은 오로지 올바로 해석된 교리와 교회와 그 지체들의 완전한 생활뿐이다.』(사목헌장 21) 신에서 멀어져가는 현대인과 교회와 접촉하는 길을 첫째로 「올바로 해석된 교리」를 가르침에 두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교회의 이와 같은 선언은 한편 종교교육론에서 당면하고 있는 위기에 그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올바로 해석된」이란 말에 「액센트」를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에는 올바로 해석되지 못한 교리를 현금에 가르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때문이다. 그러면 교리교육의 몇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 신과 인간과 세계
『세상만물은 인간을 그 중심과정 점으로 삼고 인간에게 질서 져야 한다는 의견에는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거의 일치한다.』(사목헌장 12) 그런데 현대인의 인간 중심적 세계관과 성서적 인간상 사이에는 공통된 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구약성서에서 그 실례를 들어 본다.
창세기 2·4 이하에 있는 창조설(야훼스트 사료)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신은 땅과 하늘을 창조하셨다고 했고 여기서 창조의 시초와 근본을 땅에 두고 있다. 신은 땅을 근본으로 삼아 거기서 부터 또는 그것 위에 지상만물을 나게 하셨다. 그리고 사람도 땅에서 참조하시되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 창조하셨다.
신은 땅을 사람에게 위탁하셨다. 현대말로 표현하면 세계를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다. 이점은 또한 창세기 2·19이하에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다고 한 것을 보아서 더 강조된다.
신이 직접 하지 않으셨고 사람에게 이것을 하도록 맡기셨다는 것은 구약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제관계사료인 창세기 1·27 이하에도 신이 아담과 이브(남녀의 인간)를 강복하시며 『온 땅을 채워 그를 복종시키라』하는 말이 있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원조의 범죄 후에도 사람의 세계에 대한 책임이 박탈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와 그 역사를 책임지고 더 「채우기를」(발전시키고 지배함) 배우게 했다.(MARTIN BUBER) 따라서 사람은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는 발전시킬 책임을 지고 있다. 책임은 한대답이다.
세계는 인간과 신과의 대화적 생활 범위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그 세계 안에 있는 존재로서 신과 대화한다. 신은 사람을 통해서 세계를 발전시키며 사람으로 하여금 세계를 지배케 한다. 그 다음 출애급기에 실려있는 이스라엘백성의 에집트에서의 해방사는 구약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나타낸 본보기라고 할만하다. 신은 이 해방의 동인(動因)이 된다.(출애급 3·8) 그리나 그 해방을 이루는 일은 인간 모세와 그의 백성의 차지가 된다.(출애급 3·10 이하) 에집트의 신(神) 프타(PTAH) 사람이 그의 이름만 정확하게 부르면 모든 행복을 주고 모든 불행을 면케하는 미신적 신이었다. -모세가 신의 이름을 추구한 것을 상기하자- 그러나 모세에게 계시하신 신은 이와 같은 미신적신이 아니고 사람의 운명과 역사를 사람 자신이 개척하고 창조해 나가도록 하는 신이었다. 이 사실은 신의 이름을 물어보는 모세에게 내린 신의 대답에서 잘 드러난다.
그 대답은 『내가 있노라』였다.(출애굽 3·14) 이것은 바로 이름을 알고자 하는 물음에 대해서 꼭 들어맞는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신의 본질을 드러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화적 입장에 서있는 신임을 밝힌 대답이다. 마르틴부버는 이 대답을 『나는 내가 있을 때에 있겠노라』고 번역함으로써 신과 인간역사와의 관계를 더욱 근사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신은 인간역사 안에 내재하면서 움직이고 있는 존재이면서도 사람의 고유한 창조능력과 세계 지배권을 사람에게 제한하지 않는 신임을 알아듣게 된다.
세계를 인간기술 밑에 내려다보는 현대인의 세계해석은 성서적 세계관과 위와 같은 점에서 상통할 방법이 있지 않을가? 물론 후자는 세계를 초월하면서 세계에 가까이 관계하는 신과 대화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점이 전자와의 근본적 차이점을 이루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상과 같은 성서적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좀 더 올바르고 뚜렷하게 선교 한다면 현대인과의 접촉이 훨씬 원활하게 될 줄 안다.(사목현장 12와 36) (계속)
이경우(신동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