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을 잊은 듯, 초겨울이 추워질 생각을 하지 않아서 나는 성탄절이 가까와 옴을 몰랐던 것 같다. 직장에서 집사이를 바삐 오가다 보면 어제 다녀온 것 같은 성당을 다시 가야 할 날이 내일로 다가서곤 한다.
천주님도 유행과 근대화를 좋아하시는지 교회에서 축일 횟수가 점점 줄어지고 간편화되는 것은 편리하면서도 아쉽다. 모든 성인축일을 지내고 11월 말이 되면 나는 아이들과 「아기예수를 기다리는 고리환(ADVANT WRATH)을 만들기에 바빠진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아슬하고 아픈 즐거움을 어린것들은 맛보는 것이다.
푸른 향나무 진이 손에 엉키고 손끝을 찌르는 즐거운 아픔을 나누며 성탄절을 어린것들은 기다린다. 둥글게 만든 향나무 원 속에 세 자루의 흰 초와 붉은 초 하나를 세워 장림기간 네 주일을 기억하게 한다. 원위에 매어진 네 개의 보라색 「리본」을 매만지는 어린것들에게 물어본다. 『향나무의 푸른 것을 둥글게 만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하고 묻는 어머니에게 큰 것이 답한다.
『천주님은 항상 변함이 없으시고 끝이 없으시다는 의미에서 둥글게 하죠』
『보라색 「리본」은 무엇을 의미 하지?』하는 동생에게 큰 것이 신이 나서
『보라색은 아기 예수님의 생신이 빨리 왔으면 하고 기다리는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것이래』하며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어린것들이 진이 문은 손끝을 엉거벌리며 형에게 되묻는다.
『그래 그래. 그때 부활절에도(봉제때) 보라색은 슬퍼서 쓴 것이라고 했지』하고 우쭐대며 아는 척하는 품이 귀엽기만 하다. 그 옆에는 빈 구유를 채울 색동 「테잎」이 있다. 자기들 나름의 착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실천했을 때는 제각기 정해준 색갈의 「테잎」을 하나씩 구유에 달아놓게 해준 것이다. 앞으로 오실 아기예수의 잠자리를 좀 더 포근하게 저희들의 착한 일로 마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녁이면 아기예수를 기다리는 촛불을 순번제로 밝히고 하루를 제 나름대로 반성하며 「주모경」을 외운다. 기도가 끝나면 셋이서 자기색 「테잎」을 구유에 하나 또는 둘씩 넣는다.
물론 어떤 일을 했는지 묻지도 않고 물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어린것들이 착하고 예쁜일 이외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말이다. 하지만, 나는 혹시라도 성인들의 잘못 인식된 사교적 또는 상업적 가치만을 표면화 한듯한 성탄절이 그대로 어린마음에 심어질까 염려된다. 그리하여 결과도 중요하지만 살뜰한 준비과정이 보람된 경험으로 잔재해야 된다고 더욱이 생각하게 되었다. 바쁘게 쫓기고 쫓다가 그립고 정답던 옛벗, 옛스승께 1년이 다하도록 까맣게 잊고 있다가 성탄절이되면 한번 아름답던 옛추억을 되씹으며 성탄 「카드」를 보내려고 「싸인」을 한다.
어린것들이 옆에서 저희이름을 적으며 돕는다. 봉투에 넣는 일 우표를 붙이는 일 모두가 착하고 예쁜 일이다. 어린것들은 아빠 엄마의 고마웠고 정다웠던 옛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성탄절 노래도 부르고 하면 이것이 곧 그들 다운기도며 착한일이 아닐까하고 나는 믿고 싶다.
나어린 그들에게서 옛성인 성녀들과 같은 성탄에 대한 묵상을 기대 할 수도 없지 않을까?
그렇다고 「싼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미운짓을 하면 좋은 선물을 안 준다는 조건이 붙은 사랑을 성탄절에 결부시킨다는 것은 더욱 안될것 같다. 갑자기 어린것들에게 큰 덕행이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아기예수를 미워하고 성탄절이 귀찮은 행사의 하나로 인식되지 않을까 두렵다. 나는 엄마가 신고나갈 신을 바로 놓아준다든지 문 여닫는 심부름을 했을 때 고맙다는 치사를 잊지 않을 뿐더 러 이같이 평소에 하던 일만으로도 구유를 채울 예쁜 짓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믿어야할 것 같다.
우리는 이보다 더 큰일을 어린것들에게서 바릴 수 없으며 모름지기 단순하고 평범한 것에서 성스러움이 있다고 天主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나는 기억한다.
김인자(서강대교육심리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