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에 서명날인한 33인 중 프로테스탄트신자가 16인이었고, 나머지는 천도교 · 불교 · 유교의 인사들이었다. 이상 33인중 李甲成 선생 한 분만 아직 살아계시다. 이갑성 선생은 프로테스탄 신자였는데 약 10년전 가톨릭에로 개종하였다.
그는 기미운동 당시를 회고하여 말하기를 지금은 신 · 구교파 교역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화도 나누고 교회당에 서로 넘나들며, 설교도 하지만 저 당시에는 교역자들은 물론, 신자들도 절교상태에 있어 犬猿之間으로 지냈으니 이런 운동을 사전에 천주교 신자들에게 미리 내통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던 일이라고 증언한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六堂 崔南善 선생은 말년에 이르러 佛敎를 떠나 역시 가톨릭에로 개종하였는데, 이분 역시 저때를 회고하여 말하기를
중앙 교구본부에 불란서인 뮤뗄(閔) 대주교 한 분이 있었고, 명동성당에 뽀아넬(朴) 신부와 약현성당에 위일모(禹) 신부 한 분이 있을뿐 서울에 다른 성당은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천주교당은 「불란서교회」로 통칭되었다. 한국인 신부는 어떤 분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도 없었던 것이다.
다른 편으로 프로테스탄 측에서도 이 운동을 미국인 선교사들에게는 절대 비밀에 붙이고 있었다.
이유는 우리민족 문제에 타국인을 연결시킬 필요가 없을 뿐더러 그당시 이땅에 복음을 전하는 원줄기는 미국인 선교사들인데 이들에게까지 누를 끼친다면 일본제정은 이것을 구실삼아 이 원줄기를 아주 잘라버릴 것이 아니냐라는 것이었다.
그런즉 불란서인 주교나 신부에게 이것을 알릴 수도 없는 반면에 천주교 신자중 대중을 포섭할만한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이런 극중한 비밀을 천주교 신자라고 아무에게나 내통할 수도 없는지라, 그대로 지나칠 수 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저때는 라디오는 물론, 신문도 없던 암흑시대였다. 고로 우리 일반대중에게 저 기미운동은, 지나간 5·16 혁명처럼, 돌연 폭발한 화산과 같았다. 도처에 교우들은 이웃 주민들과 함께 각기 제 나름대로 활동하였다.
이보다 앞서 安重根 의사는 천주교 신자로서 불국인 홍 신부로부터 세계의 대세와 동양의 정세를 듣고 의분을 참지 못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기미운동 시절, 우리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 불란서 租界에 있어 독립투사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국내에 있던 그들의 가족과 동지들이 그들에게 送金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들이 지방에 있는 신부들에게, 신부들은 교구본부 경리부에, 경리부는 상해에 있는 교회경리부에 연락하여 편의를 돌보아준 것은 극비에 속하여 있었으니, 뮤뗄 주교도 이것만은 몰랐다. 관계자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났고 오직 한분이 아직 살아있다.
저때 강화도에 李海用이라는 교우가 경부로 있었다. 체포의 대상이된 독립투사들에게 피신하라고 여러번 미리 내통하여 주었고, 독립운동자금을 가지고 가던 인사들을 압록강 건너 안동현에까지 무사히 넘겨주기도 여러번 하였다. 그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런 사실들을 지금와서 일일히 들추어 낼 필요도 여유도 없다.
딴 이야기지만 데 발레라를 중심으로 한 애란 독립운동자들은 가톨릭 일색이었지만 「교회로서」 이런 운동을 펼쳤다고 나는 보지 않는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무엇을 의도하였던 것이며 기미운동의 결과로 과연 우리가 해방되고 독립되었는지는 역사가들이 다른 각도에서 공정하게 다루어 볼 문제이다.
한일합방당시 시골 우맹은 이제 양반과 관원의 착취가 없는 살기좋은 세상이 되는가 보다하고 어리둥절 하였다. 그리고 孔孟을 무시하는 「신학문」을 받아들이기 싫어하여 각읍 보통학교는 학생모집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러던중 폭발한 기미운동은 혼미한 민중에게 독립정신을 불질러 주었고 『배워야 산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횃불로 3천리 강토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래서 학교문이 터져라 하고 입학생이 조수처럼 몰려들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기미운동이(우리의 피해는 컸지만) 우리민족사상의 한 전환기가 된 것은 틀림없다. <끝>
尹亨重(신부)